[51계획] 56딛 2; 1-8 누가 바른 교훈을 지켜야 하는가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56딛 2; 1-8 누가 바른 교훈을 지켜야 하는가_1
2018. 9. 23. 주. 주일오전.
*개요: 은혜의 결실인 삶의 변화, 51계획, 4극본, 6서신서 [딛]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딛]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딛]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딛]2: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딛]2:5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딛]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딛]2: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딛]2: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 1장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디도서가 왜 쓰여졌고 어떤 목적으로 디도가 그레데섬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경이 왜 쓰여졌고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은 너무 방대합니다. 쓸데없이 너무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닐까요? 어린아이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가 필요할까요? 청년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가 필요할까요? 노인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가 필요할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성경은 엘리트계층에 고학력을 가지고 높은 생활수준을 가진 장년남성이나 여성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조차 성경 전체를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 전체는 신학자나 목회자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인가요? 알고 보면 신학자나 목회자도 성경만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성경 이외의 다른 다양한 문헌들이나 숨가쁘게 펼쳐지는 현장 사역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지 정작 성경 전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 전체는 아무를 위해서도 필요해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고 다 삭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제가 조금 과장해서 설명한 것뿐이지 성경은 전혀 삭제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필요한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도 청년을 위해서도 장년을 위해서도 노인을 위해서도 신학자나 목회자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바로 복음의 원리 하나 만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바로 이 말씀을 받쳐주는 근거들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2:10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성도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성경기자와 다양한 시대와 상황과 환경에서 성경이 기록되어 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과 우리가 독생자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심을 알고 선한 일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려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강 서쪽에서는 현재 공사가 한창인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월드컵 대교입니다. 201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서 2015년에 완공이 목표였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2021년으로 개통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래도 현재 꽤 다리의 모습이 완공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밑으로 5000톤급 크루즈 여객선이 다닐 수 있도록 교각 사이가 한강 다리 중에서 가장 넓은 225미터에 달합니다. 단순히 한강을 건너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간단한 이동을 위해서 11년 동안 다리를 건설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리가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어져야 그 간단한 이동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성경 전체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쓴 이유였고 디도가 그레데섬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원리를 생각해 보면 그 다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아니라면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의 시인일 뿐이었지 삶으로는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결국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지탄과 비난을 받는 일입니다. 아예 안 믿으면 안 믿었지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변화되고자 할 때에 성경은 바울이 디도에게 가르쳐주었던 바른 교훈의 삶을 우리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천년전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그레데섬에서 목회하던 디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이 시대에 이곳에 사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딛]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디도는 그레데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삶을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신앙원리만 말하고 삶에 대해서는 함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바울은 적극적으로 디도에게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꾸짖으며 하나님을 시인할 뿐만 아니라 행위로도 시인하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도록 그들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고 신학을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며 더 나아가서는 각종 지식들을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삶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교훈 자체가 무너질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우리 나라에서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교훈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른 교훈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또한 다른 이유로 욕을 먹는 것은 다 이겨낼 수 있지만 바로 이러한 삶의 문제로 욕을 먹는 것은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뼈아픈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워야 하고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의 난제에 부딪칩니다. 그것은 과연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4,5절입니다. “[딛]2: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딛]2:5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디도가 직접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든 여자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다른 말은 다 좋은데 문제가 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집안 일을 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 때문에 이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은 전체가 다 어렵게 느껴지게 됩니다. 차라리 집안 일을 하게 하지 않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젊은 여자들에게 민감한 이런 말을 듣다 보면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는 상관없지만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는 진정한 바른 교훈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서 과연 현대의 삶에 대해서 어떤 올바른 교훈을 줄 수 있기나 한지도 의문스럽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잘 이해해서 복음의 원리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절에서도 나타나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는 것이 되지 않게 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은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렇게 사는 삶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비방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올바르게 말씀을 이해하고 바른 교훈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누가 이 바른 교훈을 지켜야 하는가’입니다. 그 속에 이 말씀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젊은 여자만 지켜야 하는 말씀일까요? 젊은 여자만 집안 일을 하고 젊은 여자만 남편에게 복종하면 되는 것일까요?
애초에 디도서는 각 직분자들에 대한 교훈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세울 때 그 기준을 직업이나 학력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도덕적이며 삶의 기준을 중요시 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권면과 책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직분자들이 자신의 삶이 뒷받침 되면서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의 삶을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럴 때 모두가 같이 바른 교훈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의 내용은 결코 일부 사람들을 위한 검증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를 위한 삶의 방향성을 세워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방향성을 올바르게 지켜 나갈 때에 다른 사람들도 그 방향으로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법을 만드는 사람이 먼저 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이 먼저 치안을 어기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안전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국방을 담당하는 사람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소홀하다면 어떻게 나라를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금을 걷는 사람이 탈세를 한다면 어떻게 세금을 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사적인 일탈을 일삼는다면 어떻게 제대로 공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예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먼저 돌볼 때 다른 사람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디도서의 말씀은 결코 일부 해당되는 사람들만을 위한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며 행위로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바른 교훈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이 모든 교훈은 적용되었습니다. 바른 교훈을 지켜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로 2장 2절부터 읽어봅니다. “[딛]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남자만 절제하며 경건하고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늙은 남자가 먼저 솔선해서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그 모습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들도 절제하며 경건하고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늙은 여자가,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가 따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절제, 경건, 신중, 온전함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악한 사람들 조차 복음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서는 누구나 다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를 가보십시오. 하나의 좋은 문화는 계층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그 좋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 처음 들어가는 사람조차도 그 문화에 동화되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십시오. “[딛]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특별히 늙은 여자에게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않고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한 것은 그 계층의 세상 사람들이 특히 그런 부분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 있는 나이든 여성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차별화될 때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놀라운 차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좋은 영향력을 나타낼 때 동일한 믿음 안에 있는 다른 늙은 남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가 바로 그러한 삶을 본받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원리 속에서 처음에 우리가 보았던 젊은 여자들에 대한 바른 교훈이 나타납니다. “[딛]2: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딛]2:5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나이든 여성들이 젊은 여자들을 교훈해서 자신의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함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젊은 여자들을 통해서 그 남편이 그러한 모습을 본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 자녀가 그 모습을 본받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남편이 자신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순전하여 집안일을 하고 복종하는 아내를 싫어하겠습니까? 어떤 자녀가 그런 어머니를 싫어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족은 그 젊은 여자를 통해서 좋은 본을 받겠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해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선 교회를 나오게 하고 그 다음에 바로 이러한 삶을 가르쳐야 하겠지요. 스스로 저절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가르치면 됩니다. 그것이 변화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누군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솔선수범하는 자들이 바로 젊은 여자들인 것입니다.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라는 것이고 그 모범을 통해 모두가 변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6-8절입니다. “[딛]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딛]2: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딛]2: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젊은 남자들이 신중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럴 때 다른 젊은 남자들도 신중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교훈에 부패하지 않고 단정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실수를 찾고 우리의 헛점을 찾아서 공격하려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럽게 되어 우리를 악하다고 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중요하고 그러한 우리가 중요합니다. 비난받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신이 떳떳하고 그러한 자들이 모인 우리가 복음을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들을 사랑하시며 우리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러한 바른 교훈을 지킬 수 있게 하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 나라에 갈 때까지만 존재할 것입니다. 바른 교훈의 가르침도 이 세상에서 뿐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그런 교훈의 가르침이 필요 없습니다. 그 나라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이 온전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바른 교훈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가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귀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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