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충만] 50빌 1; 15-21 모든 어려움 속에서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사람들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
50빌 1; 15-21 모든 어려움 속에서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사람들_1
2018. 4. 15. 주. 주일오전.
*개요: 복음의 자녀들의 모습, 56충만, 6서신서, 1적용 [빌]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빌]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빌]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빌]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기쁨이 될 수 있고 또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쁨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게 되고 또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첫 번째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에는 그 가나안에 대해서 불평하고 거부함으로 인해서 들어가지 못했지만 다시 이어지는 광야 생활 동안 가나안을 사모하며 살았을 때에 마침내 두 번째에 그 사모함 속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가나안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부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발로 가나안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싫어하고 거부하며 힘들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 대해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면 실족하게 되고 실족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로부터 더욱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친밀해져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일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기뻐하는가는 그들의 삶을 좌우합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기뻐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백짓장이라도 맞들려고 할 때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렇게 의견일치가 안되고 분열이 일어나면 전혀 엉뚱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기쁨을 가지고 동참해야 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도저히 기뻐할 만한 상황과 형편이 아닐 때에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나 형편이 전혀 아닐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런 어려움은 다양한 이유로 인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상황은 각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물질’적인 유익을 원하는 사람은 뭔가 보상이 없을 때 기쁨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는 ‘환경’적인 편리함을 원하는 사람은 불편한 환경일 때 기쁨으로 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들은 ‘즐거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기쁨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보상이 있으면 훨씬 더 기뻐하면서 할 수 있을 것이고 장소적인 편리함이 있으면 더더군다나 흥이 넘쳐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돕는 사람들까지 많아서 북적이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즐거움과 행복이 넘쳐나는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일이 돈이 많고 환경이 좋고 사람이 많다면 누구라도 하고 싶어 하는 최적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생활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돈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돈이 늘 부족합니다. 환경은 항상 열악합니다. 건물도 없고 장소도 협소할 때가 많습니다. 더 넉넉하지 못하고 더 풍성하지 못한 조건들이 주어집니다. 사람의 부족은 모든 하나님의 일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할 일은 많지만 일할 사람은 적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 일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빌]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빌]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사도 바울의 주변에는 복음의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안좋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는 하지만 정말 순수한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투기하는 마음과 분쟁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아예 전도를 안하는 것도 아니고 전도를 하기는 하는데 나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착한 자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세워진 것을 믿고 사랑으로 지원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하였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악감정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존재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모든 착한 자들의 마음을 낙심시킵니다. 더군다나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중단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고 모두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전파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과 형편에서는 도저히 기쁨을 가질 수 없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을 해 나갔을까요? 그의 해결 비법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더 큰 목표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빌]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전파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자들의 겉치레나 악한 마음으로 인해서 실족하지 않았고 선한 자들이 악한 자들에 의해서 훼방받는다고 해서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온전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전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경제적인 여유나 보상이 있어야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환경적인 편리함이나 쾌적함을 누려야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사람들의 많음이나 혹은 협조나 지지가 있어야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있어야만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전파는 그런 문제들 속에서도 여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가 보장되어 있었습니까? 혹은 환경적인 편리함이 보장되어 있었습니까? 또는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이 항상 뒤따랐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때로 배고프고 못 먹고 불편하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반대와 배척과 외면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오직 전파되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하였고 그 기쁨 때문에 주님을 전파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무엇이 더 절실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쁨을 누렸고 기뻐하였습니다. 옛날에 교회에서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연탄 난로를 피워가며 말씀을 듣던 사람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산에 천막을 치고 수련회를 하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주일에 교회를 가기 위해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이유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 그 모든 문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어려움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진실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심장박동과도 같습니다. 신앙인의 심장이 살아있는가 살아있지 않은가를 생각할 때 가장 큰 기준은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지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장박동은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심장에서 온몸에 피를 보내주는 일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에너지는 시기와 질투와 투기와 분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런 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기뻐하였다는 것이지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방식을 따라서 동일하게 전파를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도 어리석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진정한 이유를 기쁨에서 찾지 않고 오직 악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거나 자기 세를 불리려고 하거나 더 많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노력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전파됨을 기뻐하고 기뻐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기쁨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우리 속에 살아 숨쉬는 그리스도의 심장이 생기게 됩니다. 더 크고 튼튼하며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18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항상 견지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기쁨입니다. 스트레스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 힘들게 만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악물면서 링거를 맞아가면서 죽을 힘을 다해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건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부흥이 될 지 모르지만 대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당하는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과 상황적인 불편함과 외로움과 적적함은 그래도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기쁨 때문에 견딜만한 것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사라지고 상황적인 불편함이 개선되며 사람들이 늘어나서 외롭지 않고 적적하지 않게 되더라도 항상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본질을 계속 나누고 이루며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지 그 착한 뜻을 버리고 악한 뜻으로 변질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그는 이런 기쁨과 자발적인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이 자신을 도와주었던 빌립보 교회의 간구와 그를 이끌어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 고작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랬던 것인가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구원의 의미는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구절만 보고 그가 자신의 구원을 받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그의 구원은 그를 이방의 사도로 부르셨던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세주로 부르셨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 예수님을 본받아 사도 바울도 자신의 부르심을 온전히 이루는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고 그에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리스도로 인해 심장이 뛸 때에 그리스도는 얼마나 존귀해 지는 것입니까! 반대로 내가 그리스도를 기뻐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물질의 유익이나 환경의 안락함이나 사람들로부터 얻는 즐거움을 기뻐하는 자라면 그래야만 기뻐할 수 있는 자라면 그리스도는 얼마나 무가치해지고 비천하게 여겨지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는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변 상황과 현재의 문제에 국한되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요소로 인해서 실족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사람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일 뿐이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우리의 말도 동의가 될 때에 그 말에 연합이 되어서 일치가 될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리스도를 기뻐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이 물질이나 환경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됩니다. 놀라운 생명력이 바로 내 속에 나를 숨쉬게 하고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내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는 그것이 됩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들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마음을 온전히 가져서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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