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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42눅 17; 1-4 용서하는 삶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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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7; 1-4 용서하는 삶의 중요성_1

 

2017. 11. 26. .주일오전.

 

*개요:  용서의 가치,

[]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자에게는 화로다

[]17: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수준을 벗어나서 높이 날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복수와 앙갚음, 원한과 증오 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 속에는 자존심과 체면과 유익과 후련함이 있습니다.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보다 더 높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우리는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를 따를 때의우리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행기가 이륙할 때에는 활주로에서 힘차게 달립니다. 그런 다음에 비행기 몸체가 붕 떠오르게되고 하늘 위를 향해서 높이 날아오릅니다. 그런 다음 비행기는 하늘 높은 곳에 올라갑니다. 이렇게 비행기가 높이 떠 있을 때 아래를 내려다 보면 세상이 작게 보입니다. 그렇게 작게 보여진다는것은 비행기가 아주 높게 떠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그렇게 작게 볼 수 있기 때문에아주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뜻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차이를 나타낼 때 우리는 신앙과 믿음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그 용서의 은혜를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얼마나 발전하는지모릅니다. 그 반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전혀 용서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때에는 우리는 얼마나 퇴보하는지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동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갑니다. 바로 용서의 은혜를 따르고자할 때 그렇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경고해주고 회개할 때 용서해 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우리 자신의 뜻은 죄를 범해도 경고하지 않고 회개해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뜻은 죄를 범했을 때 경고하고 회개하면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뜻을 따를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준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더 높은 수준으로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가 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중요한 말씀을 더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용서는 조건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면 그것은 저의가 의심스러운 상태입니다. 또한 그러한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용서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용서는 대상자의 조건이나 상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용서하시는하나님께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지 사람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구한다면 용서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은혜는 하루 일곱 번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용서의 은혜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지속적입니다.그래서 그 용서의 은혜를 따르는 자들도 역시 지속적으로 용서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서 우리에게는 항상 조건이 있습니다.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조건을 넘어서고 한계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습니다.한두 번 용서를 해줄 수는 있어도 언제까지나 용서를 해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자신의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그 용서는 결국 나의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만약 가족이라고 해보십시오. 남편이 그렇게 매번 잘못을 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계속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아내가늘 실수를 하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를 해줘야 할까요? 아들이나 딸이 끊임없이 실수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래도용서를 해줘야 할까요? 만약 친구가 그렇게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어떻습니까? 늘 지각하고 늘 말 실수하고 늘 괴롭히고 늘 마음 상하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마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말한다고해서 다시 용서를 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한 번쯤은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되는 경험이 있습니다. 커다란 피해를 보았거나 심각한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모욕감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적도 있습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기도 했습니다.단순한 실수나 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악의적이고 일부러 고의적으로 행한 악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용서를 생각할 때에는 도저히 용서를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죄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 커서 용서를 생각하지도 못하게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용서를 모든 상황에 다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네 형제δελφόςσου (your brother)’이고 육신의 형제나 혹은 믿음의 형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악인에 대해서 다 용서를 해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경우에 용서를 해주는 것입니다. 회개도 하지 않는데 미리 용서를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용서의 제한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왜 용서를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서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용서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용서를 하셨기 때문에이러한 용서 속에 우리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심판을 하러 오신 것이아니라 용서를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다 지시고 죽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그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용서의 뜻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방향이 있습니다.그 방향으로 우리도 나아가야지 그 방향을 거부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다가 멈춰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활주로를 달리면서 떠올라야 하는데 중간에 멈춰버리면 비행기에도 무리가 생기고 원래 하려고 했던 비행도 취소되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많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따라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용서가 되어야 하는데 내 뜻대로 하는 용서라면 어느 순간에 멈춰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2014년 뉴욕 JFK 공항에서 대한항공여객기가 이륙하려다가 공항으로 되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돌린 사람은 대한항공 회장의 자녀였습니다.그는 자신에게 땅콩을 서비스하던 승무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이에 대해서 설명하던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했습니다. 그 자녀는 나중에 이로 인해서 구속되어서 법의 심판을 받았고 집행유예형을 받고 풀려났습니다.이륙 준비중이던 비행기를 한 개인이 돌려세운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우리를 용서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하며 그 용서를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우리가 우리의 형제에 대해서 그러한 용서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물며그 용서의 대상이 우리의 가족이고 친구요 교인이고 성도인데 그 대상에서도 하나님의 용서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 속에서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해야 하는 일은 예수님의 용서의 방향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용서가 시작되고 그 용서가 진행될 때에 우리도 거기에 같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륙하는비행기를 돌려세우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진행되는 예수님의 용서를 자신이 가로막고 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 용서 속에 함께 따라갈 때에 그 안에서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놀라운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 용서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이 용서를 해주시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 두 번째 이유는 용서를통해서 그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용서를 하라고 하신 말씀보다 앞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내용 속에 들어 있습니다.

“[]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7:2        그가 작은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하게 되는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족하게 하는 자에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작은 자 중의 하나를실족하게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심으로써 작은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화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용서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작은 자나 연약한 자가 실족해버리지 않도록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해 주면 새로운 기회를 주게 됩니다. 그러면 그 기회를 받아서 다시 도전하고 다시 새롭게 되어서 마침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용서를 해주지 않으면 그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가 절망하고 낙심해서 올바르게 서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해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용서를 통해서 그 죄지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서돌이켜 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용서를 해주셨고또한 용서를 해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바로 설 수없는 사람인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바르게 설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끊임없이 용서를 해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그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재림주로 오실 때에는 이러한 모든 가능성이 전부 사라진 다음입니다. 구원받을 자가 모두 구원을 받고 바르게 설 자가 모두 바르게 선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고 구원받은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나누십니다. 그 때에 이루어지는 심판은 용서를 못해주는 심판이 아닙니다.용서는 이미 용서받을 만한 자에게 온전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때에 이루어지는 심판은죄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그의 무리들에 대한 온전한 처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예수님은 그 전까지 한 영혼을 찾으시면서 용서를 온전하게 이루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도 역시 그러한 용서에 동참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용서를 통해서 한 영혼이 실족하지 않고 올바르게 서게 됩니다. 바로 그 한사람이 변화를 받아서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였을 때 처음 그를 용서한 사람은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인해서 그의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를 용서한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바나바를 통해 그는 교회에 정착하고 성경교사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 바울을 용서한사람은 안디옥 교회 교인들입니다. 그 교인들은 바울을 성령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선교의 일을 위해서 바나바와함께 바울을 파송하였습니다. 이러한 용서를 통해서 바울이 바울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이름이 사울이었지만 회개이후에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용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가교인이 되고 성도가 되는 것이고 그 성도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됩니다. 그렇게 받아주고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남편이 변화되고아내가 달라지며 아들과 딸이 돌아옵니다. 우리의 친구가 회심을 하고 교인이 직분자가 되며 사역자가 됩니다.이러한 놀라운 일이 바로 용서에 동참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용서를 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그렇게 용서를 할 때 내 자신이 실족하지 않습니다.내 자신이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도 처음 바울에 대해서 걱정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내어 바울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도 마가요한의 일로 바울과 갈등하고 헤어졌지만 나중에 마가요한을 바울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때 관계의 회복을 이루었던 것으로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끝내 증오하고 거부한다면 바로 그 누군가를 천국에서 어떻게 만나게될 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실족하게 하지 않고 스스로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될 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용서가우리의 마음 속에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과 여러 가지의 일을 더욱 함께 할 수있는 것입니다.

 

이번 달 용서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용서를 따르는 마음으로 나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용서 속에서 우리 자신이 받은 커다란 하나님의 용서가 날로 샘솟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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