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긍휼] 54딤전 1; 12-17 내가 긍휼을 행하는 이유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
54딤전 1; 12-17 내가 긍휼을 행하는 이유_1
2017. 9. 24. 주. 주일오전.
*개요: 긍휼의 의미, 6서신서, 2분석, 55동행-64긍휼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지금까지 우리가 긍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을 때 어쩌면 여러분들은 자신이 아닌 그 어느 누군가를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긍휼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긍휼을 자신이 받아본다면 그것도 역시 얼마나 좋을까라고 기대해 보았을 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긍휼이라는 덕목에 대해서 항상 긍휼을 받게 되는 것을 더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긍휼을 행하는 것을 더 기대합니다. 자기 자신은 긍휼을 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은 긍휼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악순환을 계속 만들 뿐입니다. 여기 긍휼이라는 선순환이 있는데 그 긍휼의 선순환을 누리기만 원하고 그 선순환을 자신은 행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선순환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도까지는 긍휼의 혜택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 긍휼의 혜택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때가 옵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그 자신이 긍휼하지 않는다는 악순환 속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삶이나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삶의 방식 그 자체가 하나의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그 악순환이 지속되고 지속되다가 마침내 더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악순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파국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긍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긍휼의 선순환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긍휼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긍휼을 행하는 그 사람이 선순환 속에 사는 자입니다. 어떤 다른 사람이 긍휼을 행하면 그 사람이 긍휼의 선순환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긍휼을 행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긍휼의 선순환 속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긍휼을 행하기 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긍휼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긍휼을 행하게 되기 위해서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이든지 긍휼을 행하게 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 필요한데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자신이 긍휼을 행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찾는 것은 그냥 성경을 읽어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찾고자 할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생각과 묵상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자신의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마치 열쇠를 여는 키와 같습니다. 그 키를 통해서 잠긴 것을 풀고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긍휼을 실천하게 되는 것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키를 발견하지 못하면 여전히 긍휼에 대한 변함없는 태도와 자세를 가질 뿐이지만 그 키를 발견하고자 하고 발견하게 되면 자신을 묶고 있고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던 중요한 올무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본문을 살펴볼 때 중요한 구절은 16절입니다.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인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이 긍휼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때 바울은 훌륭한 사역자요 위대한 사도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똑똑하거나 열심이 있거나 특별한 선행이 있어서 이러한 사역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을 받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오래 참으심을 보임으로써 나중에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긍휼히 여기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모범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좀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가 긍휼을 받은 이유는 주님의 긍휼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로 그를 통해서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이 나타났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그 긍휼하심을 받기 전에는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딤전]1:12 나를능하게하신그리스도예수우리주께내가감사함은나를충성되이여겨내게직분을맡기심이니 [딤전]1:13 내가전에는비방자요박해자요폭행자였으나도리어긍휼을입은것은내가믿지아니할때에알지못하고행하였음이라” 그는 이전에 주님을 비방했던 비방자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박해자였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던 폭행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가 긍휼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줄 알지 못하고 행하였던 것이고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시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능하게 되었고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된 모습을 볼 때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결코 능하게 되지도 못하고 직분을 얻지도 못했겠지만 그가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완전히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긍휼을 베푸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변화된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감사는 그가 회심하고 변화된 이후부터 시작되어서 지금 그의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항상 그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 자였고 그러한 악한 자인 자신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히 여기셨는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는 항상 죄인 중의 괴수였을 뿐입니다. “[딤전]1:14 우리주의은혜가그리스도예수안에있는믿음과사랑과함께넘치도록풍성하였도다 [딤전]1:15 미쁘다모든사람이받을만한이말이여그리스도예수께서죄인을구원하시려고세상에임하셨다하였도다죄인중에내가괴수니라” 자신이 얼마나 낮은가를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던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님과 대화까지 나눴기 때문에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은혜는 자신이 낮춰지면 낮추어질수록 예수님은 높아지는 은혜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높였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빛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낮췄을 때 예수님의 은혜는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 빛이 바로 긍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긍휼이 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의 놀라우신 긍휼을 알게 됩니다. 그 긍휼을 통해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사모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럴 때 또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긍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긍휼을 고백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던 사도 바울도 그 긍휼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긍휼을 받고 고백하면서 사도 바울 자신도 그 긍휼을 나타내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전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이라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이 받은 긍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우리 자신이 긍휼을 행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에게 긍휼을 나타내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로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인지 긍휼을 나타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본을 보여주심의 핵심은 단순히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얼마나 그 은혜가 풍성하신지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을 긍휼히 여김을 통해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긍휼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떤아버지가중학생인아들이담배를피우는것을보고큰충격을받았습니다. 그러나아버지는걱정스런눈길만보낼뿐아들에게아무 말도하지않았습니다. 한달이지난어느날,아버지는아들을불러담배를끊으라고타일렀다. 아들은왜아버지가그때바로얘기하지않고한달이지난다음얘기했는지궁금해그이유를물었다. 아버지는이렇게대답했다. "네가알다시피나도담배를즐겨피웠단다. 그런데어떻게너만담배를끊으라고할수있겠니? 내가먼저담배를끊는것을네게보여주고싶었다. 처음에는힘들었지만한달이지난지금은완전히담배를끊었단다. 그래서이제너에게이렇게떳떳이이야기하는것이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본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아버지 자신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도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범을 보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긍휼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긍휼을 통해서 자신도 긍휼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긍휼을 누군가가 행해야만 합니다. 긍휼이 무엇이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만 그 모습을 따라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악순환과 선순환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이 긍휼을 누리고 얻고 다른 사람이 긍휼을 나타내고 보여야만 자신도 긍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이것은 악순환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아무도 긍휼이라는 선순환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그것을 하고자 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악순환되면서 긍휼을 나타낼 수 없고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면 선순환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긍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긍휼을 나타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모범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때부터 선순환이 시작됩니다. 그 선순환은 근본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녀들에게 긍휼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할 때 먼저 긍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 긍휼을 실천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긍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것은 이미 자신이 받은 예수님의 긍휼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새롭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긍휼의 모습이 자신을 통해서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긍휼을 행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또한 이러한 긍휼을 행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긍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선택입니다. 긍휼을 나타낼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긍휼을 나타내기로 선택할 때에 자기 자신이 그 모든 선택의 또 다른 모범이 됩니다. 그러한 모범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 다른 사람들은 아마 앞으로 나타나게 될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게 될 자들일 것입니다. 그 사람을 내 현재의 자녀 혹은 미래의 자녀라고 해 보십시오. 그가 주님을 좋게 생각하고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긍휼의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모습을 통해서 바로 그 사람이 그 자녀가 긍휼을 어떻게 행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잔칫집에 갔습니다. 그 집 하인이 다가와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우유를 마시겠니? 아니면 술을 마시겠니? 네가 원하는 대로 갖다 주마." 그러자 어린아이는 이렇게 주문했습니다. "아버지가 마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어린 아들을 생각하니 술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 ‘아버지는 어른이고 너는 아이니까 아버지는 술을 마실게 너는 우유를 마시렴’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은 우유를 마시겠지만 그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술을 마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아버지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아들이 하는 것이고 어머니가 하는 것처럼 딸이 하는 것이고 친구가 친구를 닮는 것이고 이웃이 이웃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시 이러한 원리대로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긍휼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사람도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긍휼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무자비하고 가장 혹독하며 가장 매정한 모습이었다면 그 다음 사람들도 역시 그와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하고 혹독하며 매정한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본이 되기 위해서 긍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게 될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 모범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긍휼을 베푸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딤전]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주님을 높이고 그의 긍휼을 나타내고 그의 긍휼을 찬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것이 되고 그로 인해서 그 자신도 역시 하나님의 선순환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순환에 들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선순환에 들어갑니다. 긍휼은 결국 주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긍휼을 행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모범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긍휼을 행함으로 우리가 받은 긍휼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 긍휼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예수님을 나타내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고 닮고 따르면서 그렇게 하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선순환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긍휼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우리의 삶의 열쇠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열쇠가 우리의 무거운 자물쇠를 풀고 긍휼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열어줄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게 되어서 그 놀라운 영광을 향해 우리의 삶이 나아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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