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성숙] 42눅 15; 1-10 하늘과 하나님의 사자들이 기뻐하는 이유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보기]
42눅 15; 1-10 하늘과 하나님의사자들이 기뻐하는 이유_1
2017. 3. 26. 주. 주일오전.
*개요: 전도의 의미, 3관점, 56충만-83전도, 5복음서, [눅]15:1 모든 세리와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15:3 예수께서 그들에게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4 너희 중에 어떤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15:5 또 찾아낸즉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6 집에 와서 그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15:7 내가 너희에게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8 어떤 여자가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15:9 또 찾아낸즉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전도를 통해 나타나는 가장 변화는 믿지 않는 자가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지 않는 자가 믿게 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믿지 않던 자가 믿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믿음의 기준이 교회를 다니는 것인지 아니면세례를 받는 것인지 직분을 받는 것인지와 상관없이 믿지 않던 자가 믿는 것은 너무나 특별합니다. 왜냐하면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약속을 믿게 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상주심을 믿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니는것도 세례를 받는 것도 직분을 받는 것도 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믿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불신앙에 남아있습니다. 그러한 불신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을위해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행하셨고 그 모든 것을 나타내 주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눈과 귀와 마음이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앙과 불순종, 그리고 불충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러한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아무 변화없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성도들도 포기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성도들은 더이상 불신자들이 믿음을 갖게 되기를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는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거북하게 여깁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눅]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아왔을 때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서기관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런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주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 생각으로는 예수님은 그들을 내쳐야 하고 그들을 거부해야 하고 그들을 버려두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자들을 다 받아주었기 때문에 마음에 안들었던 것입니다. 최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죄인들은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아니 구제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때생기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의핵심은 바로 그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믿게 될 때에 그것이 얼마나 기쁨이 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비유하건대 마치 양 한마리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과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또한 그 기쁨은 마치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과 같았습니다.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죄인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고 그로 인해서 하늘과 하나님의 천사들이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7절과 1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전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전도를 통해 얻게 되는 기쁨은 하나님이 가지시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 대해서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사자들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전도에 대해서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쁨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되어야 합니다.
과거 1983년에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이 방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뜨거운 반응이었는지모릅니다. 그 안타까운 시절의 기억을 새롭게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입니다. 그영화에 바로 그 이산가족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남철수에서 헤어진 여동생(윤막순)을 찾기 위해서 오빠(윤덕수)가 나와서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미국과 연결되어서 미국에서누군가가 방송을 보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여자분을 만나보니 도저히 예전의 어릴 적에 헤어진 여동생을떠올리지 못합니다. 또한 한국말을 못해서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오빠가 여동생에게는 귀 뒤의 사마귀가 있었다고 하니까 자신의 사마귀를 보여주는 데 정말 그 위치에 사마귀가 있었습니다. 바로 찾던 여동생이 맞았던 것입니다. 모두 다 기뻐서 오열하는데이 여동생이 헤어질 때 들은 말이 기억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을 하는데 거기까지 저도 잘 참다가그 장면에서는 도저히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기는 운동장이 아니다, 우리는 놀러 나온 것이 아니다, 오빠 손 꼭 잡아라’ 피난갈 때 오빠가 여동생에게 해주었던 말인데동생은 그 오래 전에 들었던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빠가 자기가 했던 말을기억하는 것을 들으며 오열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자의 구원이 기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받게 되기를 원하시면서 간절히 그 영혼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영혼을 그냥 우연히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안찾아도 되는데 찾아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너무나 간절히 찾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찾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를 데리고 오기까지 그가 주님을 믿게 되기까지 주님의 행하신 일은 너무나 절절합니다.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있었고 그래서 마침내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께로 왔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기준으로그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찾고 찾으셨는지를 4절과 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눅]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15: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두 가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비유에 나오는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아흔 아홉이 있으니 한 마리쯤은 잃어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시지 않고 그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돌아가지 않고 그 잃은 것을 찾아다니십니다. 나머지 양들은 그 한 마리가 찾아질 때까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위험에 처해져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래서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머지 양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날은 바로 세상에 종말이오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양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세상에는 종말이 옵니다. 이와 같이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잃어버린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과 같습니다. 그중에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은 이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애를 써서 노력하십니다. 한 드라크마의가치는 한명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5만원에서 10만원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겨우 그 정도의 가치를 위해서 그렇게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렇게 작은 가치라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낼 때까지 부지런히찾으시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되며 교통수단이 발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조금 노력하다가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찾아낼때까지 열심히 찾으십니다. 허탕도 많이 치시고 시간낭비도 많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 모든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왜나하면 예수님께서는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처럼 한 영혼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감수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주의 성도들을 통해 바로 그 한 영혼을 찾는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오늘날 경제논리에 의하면 효과가 없고 소득이 없는 일들은 애초에 포기하고 접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전도와 사역도 효과가 없고 열매가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일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아직 세상에 종말이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시대에 계속해서 평안이 있고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존재하며 성도도 계속해서 존재하는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계속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에있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존재하고 예배시간이 있고 교제시간이 있으니까 그 속에서 구원을받을 수 있는 것이지 교회가 존재하지 않고 예배시간이 없고 성경공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할 지도 모르고 인생을 허비해 버릴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 등을 켜주시기에 집을 쓸어 주시기에 그에 해당되는 일들을 해주시기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하는 일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기뻐하시고 간절히 원하시며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이일을우리도 기쁨으로 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뻐하심이 우리의 기뻐하심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기뻐하심은 그저 예수님만의 기뻐하심으로 끝나지는 않을까요? 만약우리가 이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라면우리는 기뻐하지 말아야 할 일에 기뻐하는 자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가 왜 이일에 기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것을 위해서 정말로노력하며 애를 쓰는 자들이 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눅]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양 백 마리가 있다가 그 한 마리를 잃어버렸던 사람은 그 한마리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한 마리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는 즐거워하며 그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부릅니다. 그리고 함께 즐기고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 잃은 양을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한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게 되었을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벗이기때문입니다. 우리를 벗으로 친구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우리는 예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소외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막내가 태어나서 소외받는 첫째가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벗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주님과 함께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눅]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한 드라크마를 잃었던 여인도 등을 켜고 집을 쓸며 그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에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기뻐하자고 합니다.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이와 같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셨을 때 우리들을벗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한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결국 주님의 즐거움에 우리가 동참하기 때문에 알게 됩니다. 주님이 슬프면우리도 슬프고 주님이 기쁘면 우리도 기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그분의 잔치에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벗이자 이웃입니다. 결국 이러한 즐거움 속에서 잃어버린영혼을 맞이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즐거움 속에서 주님의 즐거움에 주님의 잔치에 주님의 천국잔치에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즐겁습니다. 아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전제하고 있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에는 새롭게 얻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다가 되찾는 것이 나옵니다. 한 잃어버린 양도 원래 있었다가 찾는 것이고 한 드라크마도 원래 있었다가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영혼의 의미라면 그 영혼도 원래 주님께 있었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는 우리가 구원받는 어떤 사람이 원래는 주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영혼이 원래는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산가족이 원래는 한가족이었던 것처럼 주님 안에서 구원받을 자들은 원래 주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이미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의 죄로인해서 헤어지게 된 것이고 주님은 그것을 다시 찾고자 하십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사해주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때 그는 다시 찾은 영혼이 됩니다. 그의 본질은 회복되고 주님의 나라에서영원한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창세 전의 구원을 생각하며 더욱 주님께로 돌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기다리심과 부르심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이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즐거움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이 회복되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찾으셨던 예수님의모든 부르심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옴을 기뻐하는 하늘과 하나님의사자들과 연합하여 그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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