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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결심] 44행 1;21-26 부활증거의 직무를 행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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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21-26 부활증거의 직무를 행하는 자들_1

 

 2015.4.12..주일오전

 

*개요:    6결심, 3분석, 5복음서,

[]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1: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1: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1: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지난 주에 부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고난의 죽음에서 부활의 영생으로 넘어가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처럼 이 세상에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33세까지 사셨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든 것이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죄인을 위한 고난을 자처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 고난은 온 인류를 위한 희생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민족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가 아닌 순수하게 다른 사람의 죄만을 위해서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은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사로도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스스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처럼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난 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는 3일 만에 부활했지만 나중에는 늙어 죽었습니다. 부활하고 나서 하루 후에 혹은 한달 후에 혹은 1년 후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에 어쨌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온전한 영생의 부활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40일간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에녹과 엘리야도 예수님 앞서 하늘로 올리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죽음의 권세를 이겼던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가 하늘로 올리웠던 것입니다. 이제 그 어떤 인간도 온전히 따라할 수 없는 예수님만의 특별한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승천하셔서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동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렇게 높고 높으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 뒤를 따르는 우리는 그렇게 높이까지 따라가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해 놓으셨는데 우리는 그 영광은 보지 못하고 고작 죽음의 고난 이후에 정말 부활이 있었다는 것을 간신히 믿고 따라나가는 수준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부활에 대해서 아슬아슬하게 따라나가다 보면 부딪히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를 의지하면서 부활을 믿고 따를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더이상 나를 의지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유도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의지해서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부활에 대한 믿음은 희미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활에 대한 나름의 목표와 계획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계획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길을 갔던 예수님의 제자가 있습니다. 부활을 따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고난에 대한 길도 따라오지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는 바로 가룟유다였습니다. 성경은 가룟유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1: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자들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직무를 버리고 자기가 가기로 선택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망의 심판대였습니다. 그는 왜 자신의 직무를 버리고 가지 말아야 하는 곳으로 갔을까요? 한때 그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도 참여하겠다고 하였었는데 왜 고난에 참여하기는 커녕 스스로의 생명도 보존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의지하다가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밀고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가게 된 곳은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룟유다의 지난 날 어리석은 선택과 그가 마침내 선택한 그의 최종 목적지가 무엇이었는가는 그가 무엇을 버렸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버렸습니다. 그의 직무는 부활을 증거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로서 해야할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봉사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사도로서 해야할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는 악한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의 자리가 비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두 사람이 뽑혔는데 그중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로 세워졌고 그가 하나님의 봉사의 일과 사도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룟유다와는 달랐습니다. 자신들 둘 중에 누가 사도가 되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의 봉사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아무런 봉사의 일을 하지 않거나 혹은 전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에 그들은 가룟유다와 같이 자신의 직무를 저버리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뽑힌 두 사람은 맛디아와 바사바였는데 이 둘의 행적을 조사해보면 역시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고 각각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전승을 통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맛디아'는 베들레헴 사람이며 유다지파 문중의 소생이었고, 어려서부터 회당을 통하여 예언서와 율법서를 배워 총명했고, 자비를 베푸는 일에 앞서며 언행이 일치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도가 된 후에 유대에서 전도를 했고 에디오피아 지방에서 이방인에게 전도를 했고,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전도를 하다가 체포되어 250여명과 함께 독약을 마시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맛디아' 만 성했고 250여명은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맛디아' 250명을 일일이 안수하여 시력을 다시 찾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 순교지는 악숨이며 큰 도끼에 찍혀 죽었다고 합니다. 맛디아는 최선을 다해서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사바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분명하게 등장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522절입니다.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여기에 등장하는 바사바 유다가 바로 맛디아와 함께 추천되었던 바사바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인정하는 선지자(교사)였고,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주의 일을 성공시키며 쓰임 받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은 골로새서 4 11절에 등장합니다.

“[]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유스도가 바로 바사바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요 바울에게는 위로가 되는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로 볼때에 바사바는 사도가 되지 못하였더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이렇게 맛디아나 바사바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따라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간신히 믿던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길을 힘겹게 따라나가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룟유다와 달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내내 힘겹게 주님을 따라나가는 사람이었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지만 맛디아와 바사바는 주님을 확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가고 있었고 그 부활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절을 이미 보낸 이 시간에 우리도 한번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부활을 내 힘을 의지하며 간신히 억지로 따라가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활을 기뻐면서 따라가는 자들입니까?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부활을 확신하며 주님을 따라나간다고 한다면 우리의 자세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의지도 역시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며 부활을 따라가는 자라면 얼마 못가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활을 따라가는 자라면 넉넉하게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직무를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사라졌을 때 그 빈자리를 메꾸자고 맨처음 이야기를 했던 베드로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부활증거의 직무를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관심은 온전히 부활하심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21절입니다.

“[]1: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는 이 부활을 어떻게 증언할까, 과연 우리가 부활을 증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걱정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12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명이 자기 길을 가서 비게 되었을 때에 그 한 자리가 채워져서 함께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세우자고 한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직무에 대해서 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일에 찬성하고 베드로와 함께 부활의 직무를 행하기로 하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직무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세우는 방법으로 제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그들이 정말 부활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임명하시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살아계신 예수님께 간구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1: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교통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믿으면서 행동했습니다. 그 어떤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쩌면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신 뒤에 가장 먼저 한 행동으로서 그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드려서 예수님이 선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서 결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은 진정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믿음이 결실을 거두고 열매를 맺으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비로소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우리들인데 우리들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주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이심을 정말로 믿고 의지해야만 하는 위기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는 많은 문제들은 그러한 위기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여러가지 몸의 문제가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가정적으로 경험하는 여러가지 사건과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정말 살아계시다는 것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처한 현실과 앞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많은 난관들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외 학교에서, 직장에서, 국가적으로 처한 어려움이 우리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어두운 밤바다를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소리질렀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그들은 옆에 계신 예수님을 의식했습니다. 그들이 그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힘대로 살려고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부활을 증거할 직무를 맡았던 사람이 사라져서 그 자리가 비었을 때에 그 직무를 대신할 사람을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얼마나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그 직무를 맡았던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 직무까지도 그냥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서 주님의 일을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부활의 주님을 따라나가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가 죽지 않게 되기를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고 그 도우심을 받아서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의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활속에서 살아갑니다. 부활을 믿고 따르는 것이 그저 지식적으로 끝나지 않고 그저 간신히 믿어주는 것이 끝나지 않고 부활을 믿고 따르는 구체적인 삶과 그에 따른 실천적인 일들로 우리의 삶이 풍성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도우시고 역사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정말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이 한주 지났습니다. 아직도 부활절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뚜렷해지고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굳건해져서 우리의 삶속에 부활의 주님의 생명이 넘쳐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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