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 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새해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꼬박꼬박 돌아오는 새해는 우리들에게 항상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많은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올해 만나는 새해는 작년에도 왔었고 재작년에도 왔었고 재재작년에도 왔었습니다. 이처럼 새해는 어김없이 1년마다 돌아오지만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나이는 한살씩 늘어가고 몸도 한해씩 틀려지고 주변상황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지나간 시간만을 생각한다면 자꾸만 과거에 매여있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있던 모습, 예전에 하던 일, 예전에 거하던 장소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보면 새해가 되었지만 전혀 새해가 아니라 옛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기존의 모습을 답습하고 기존에 하던 일만 반복하고 기존에 있던 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해에 새로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말은
기존의 것이 다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우리가 더욱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다가오는 많은 좋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좋은 것은
간직하되 미래의 새로운 것도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한 삶이 되겠습니까? 오늘날의
삶은 변화무쌍한 삶입니다. 2015년의 삶은 2005년의
삶과 다릅니다. 또한 1995년과의 삶과도, 1985년과도 역시 다릅니다. 10년주기로 이세상의 삶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변화 속에 살면서 그 새로움을 자기 자신의 풍성한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 우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과거의 반복적인 삶에 사로잡혀있지 않고 미래의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얽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모할 때에 신앙생활에서도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도 늘 반복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비단
새해에만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항상 추구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옷이 더욱 새로워지는 것처럼, 이전에도 식사를 가고 있었지만 그 식사의 메뉴가 새로워지는 것처럼, 이전에도
믿음이 있었으나 그 믿음이 더욱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신앙도 단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고
염려하던 신앙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를 염려하는 신앙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새로워지는 부분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이 세상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영적인 분야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쁘게 되거나 안좋게 되는 것을 새로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은 정말 우리에게 도움이 되며 유익한 일이고 우리를 좋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새로운 일이 됩니다. 그 새로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새로운 목표로 우리를 이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기 전에 먼저 세상 사람들의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9절입니다.
“[눅] 12: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눅]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세상 사람들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도 동일하게 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걱정하면서 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와
동일하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고민은
인간으로 하여금 늘 육체적이고 현재적이며 세속적인 욕심에만 관심을 쏟게 하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시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그런 필요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거기에 목표를 두고 집착할 때에 우리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새로워지지 못하고 늘 과거에만 발목을 잡혀서 살아가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초점을 두고 살아갈 때에 특별히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면서 그 부르심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요셉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단지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 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도 애굽인들 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살았던 사람이고 다윗도 블레셋의 위협에
대한 패배주의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에 대한 담대한 목표를 마음에 품고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먹고 마시기만 했다면 어떻게 자신이 보지 못하던 땅을 바라며 자신이 이를 수 없는 위치를 꿈꿀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는 동일한 고민으로 살아가지 않고 그 너머에서 하나님의 고민하시는 것을 고민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살면서 그 나라를 얻게 하시고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그 나라 안에서 먹으면서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바로 그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를 추구하지 않으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목표가 되고 관심사가 됩니다. 또한 그러면 그럴 수록 더욱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마시고
싶은 것이 많아집니다. 결국에는 먹고 마시는 일에 발목잡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곳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인가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제사지낸 고기를 먹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채소를 먹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관할하는 환관장은 그가 고기를 먹지 않아서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색이 나빠질까봐 염려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정 반대였습니다.
“[단] 1: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단] 1:14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단] 1: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얼굴빛이 아름다웠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욕심을 쫓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더욱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세상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그속에서 함께 배고프고 함께 괴롭고 함께 누추한 삶을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풍성한 삶을 소원한다면 분명히 그러한 삶을 결단해야 할 때가 찾아옵니다. 바로 선택의 순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선택의 순간에서 정반대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향할 때 함께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각각의 기업을 키웠고 그들 각각의 소유가 커서 함께 있지 못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롯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제 선택의
순간에서 롯은 땅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쪽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너무나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 13: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 13: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입에 더 좋은 것, 자신의 눈에 더 좋은 것, 자신의
몸에 더 좋은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바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는 점차 점차 옮기고 또 옮기면서 소돔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돔성에 거하면서 그의 의로운 심령은 많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후이어서 그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물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거하면서 자신의 기업을 무럭무럭 키우고 있었지만 편리하고 안이하게
살았던 롯은 자신의 기업을 조금씩 잃어버리면서 나중에는 소돔성이 무너졌을 때 자기 몸 하나밖에 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선택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세속적인 기준과 세속적인 기호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기준과
영적인 부르심을 따를 것인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갈길이 정해집니다. 처음에는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지만 방향은 정 반대방향이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속적인 판단과 선택은
더욱 세속적이 되고 그로 인해서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만을 더더욱 고민하게 됩니다. 반대로
영적인 판단과 선택은 더욱 영적이 되어서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어떻게 이룰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럴
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본질이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 12: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다보니 하나님께 정성과 사랑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에 둔 다함이 없는 보물창고와 같아서 도적이 훔쳐가거나 좀이 먹어 상하게 되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둔 그곳에서 우리의 마음도 거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간절히 바랄 때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노력하고 애썼던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됩니다.
어느 건축가가
대기업에서 수십 년간 일해 오다가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은퇴 전 고용주는 그에게 마지막 작품으로
집을 하나 지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건축가는 그 일이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설계했습니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했고 최고의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 목재는 튼튼했고 마무리도 완벽했습니다. 드디어 집이 완공됐습니다. 마지막 작업이 순조롭게 마친 것에 대해서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 고용주는 그에게 다가와 그 집 열쇠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나를 위해서 일해 줘서 정말 고맙소. 그
답례로 이 열쇠를 준비했소. 이제 이 집은 당신의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라오.” 그는 자신이 했던 모든 노력보다 더 큰 보상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시간이 빠름을 깨닫습니다. 과거만 붙들 수 없습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시간의 허무함을 아쉬워하기 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학창생활도 끝나고 직장생활도 언젠가 끝납니다. 가정생활도 끝나고
사회생활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가장 바쁜 학창생활 속에서 그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분주한 직장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하고
여러 인간관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다시
한해가 시작됩니다. 지나간 옛날을 붙들려고 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게 살아갑시다. 주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들을 훈련시켜주십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바로 그것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도록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는 훈련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계속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가치를 보며 살지 말고 영적인 가치를 바라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각성시킵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다가오는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사십시오. 이러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그분의 목적을 바로 자신의 목표로 삼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공급하심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넘치는
감사가 여러분의 삶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