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영적상태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상태를 좀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본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혹은 특별한 예배에 참석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사역에 동참하면서 이모저모로 이전에 받았던 은혜를
다시 받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혹은 더 많은 은혜를 얻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를 위해서 잘 준비된 교회에 애써 찾아가기도 합니다. 유명한
세미나나 집회에 따라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시간을 쏟고
많은 정성을 기울여서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하였고 특별한 영적성장을 이루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들인 노력과 정성에 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좌절하게 되고 그 좌절감은 이전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보다 더 절망스럽기도 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모든 특별한 방법 속에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때로는 심각한 절망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변화와 발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방법이 혹은 저런 방법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진짜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스스로 모른다면 계속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진정한 변화가 필요할 때 변화하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진정한 발전은 언제 일어나는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자라나게 하는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효과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극본적 해석의 네 가지 단계로 우리를 자라나게 하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발단입니다. 발단에서는
신앙 성장의 원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자랍니다. 그런데 머리와 몸만 있다고 해서
다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자라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라나고 싶어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머리에서 시작되어 마디와 힘줄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도들이 자라나는 것인데 이러한 원리에 반해 엉뚱한 방법으로 자라나게 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도들은 한마디로 말하는 머리를 붙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전혀 상관없는
다른 것을 붙들었습니다. 이것은 전개에 해당합니다. 신앙성장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는 18절 중반절에 나옵니다.
"[골]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왜 어떤 사람들이 자라나지 못하는지를
깨닫습니다. 왜 많은 시간동안 이것을 저것을 하며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씀을 연구하였어도 자라나지
못했을까요? 왜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는 취약하고 하나님과는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하며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서는 부요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머리를 붙들은 것이 아니라 육체의 마음을 좇았던
것입니다. 헛되이 과장된 표현과 목적 속에서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아보이는 신앙서적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가에 대한 많은 기독교서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책을 오직 보이는 것에만 의지해서 인기위주로 재미위주로 육체의 마음을 따라서 유익을 주거나
편안을 주거나 쾌락을 주는 것을 좇는다면 절대로 어떤 책에서도 성장을 누릴 수 없습니다. 머리를 붙들어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을 이룰까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붙들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육체의 마음을 좇을 때 머리를 붙들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 정말
그리스도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책이 있지만 그 책을 버려둔채 눈에 좋아보이는 육체의 마음을 자극하는 그런 책을 붙들어 버립니다. 결코 성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책이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책은 제대로 붙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자신의
육체의 마음을 좇을 때 정말 중요한 부분은 그냥 건너가 버립니다. 읽기는 읽어도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묵상을 하고 적용을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마음을 좇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라게 하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라지 않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실까요? 이는 마치 못먹어서 잘 자라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밥을 잘 먹지 않을 때 밥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간식만 찾을 때 정말 몸의 건강에 필요한 반찬은 다 빼놓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그것도 몸에 해로운 것으로 편식하면서 먹어대는 자녀의 모습은
부모님의 슬픔이자 괴로움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렇게 자라지 않는 성도들을 보고 계십니다. 바로 그렇게 억장이 무너지고 괴로우며 가슴아프며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심으로 편협한 성도들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어려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감정과 욕구를
절대로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이를 보충하고 욕구를 채우기 위한 책만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런 방법으로 읽습니다.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닌 이런 저런 정보와 관련된 예화에만 집중합니다.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복과 능력과 목표에만 집착할 뿐입니다. 성경공부는
백날 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육체의 마음을 좇으려 하니 그리스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간절한 노력과 묵상과 나눔이 아니라 성경공부때 모여 나누는 얘기는 전부 세상 얘기 뿐입니다. 수다와 정보교환이 성경공부의 유일한 즐거움입니다. 또는 진지한 신학토론도
자기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내세우기 위함인 것뿐이지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하면 주님의 진정한 계획과 뜻이 무엇인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배를 많이 드리면 무엇하겠습니까? 봉사를 많이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뱃속에 기생충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먹어도 그 영양분이 다 기생충에게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은혜로운 시간과 집회와 봉사와 사역에 참여한다고 해도 육체의 마음을 버리지 않으니 전부
육체의 마음을 자극할 뿐입니다. 오히려 육체의 마음은 더욱 더욱 커져만 가는 것입니다.
그 육체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유익을 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가능한한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할수만 있으면 재미와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부러움을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쳐서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어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육체의 마음이고 욕구이고 죄된 본성이고
우리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들입니다. 일단 이런 마음이 있으면 성장은 커녕 퇴보와 퇴행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퇴보는 지금까지 애써 성장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주안에서 쌓아왔던 모든 믿음과 성실함을
다 깎아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이 이어지는8절에도 나타납니다.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사용하여 사로잡는 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좇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시켜주시는 일은 언제든지 예 예 하고 아니 아니요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의 발전과 성장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겸손해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것처럼 그것을 더욱 사모하고 애쓰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왜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사용하였을까요? 마땅히 섬겨야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라 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곳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라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자기의 상을 빼앗기게 만듭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일을 하고 가라 하시는 곳에 가고 만나라 하시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새롭게 목표를 갖게 되는지, 자기의
상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어떻게 해야 영적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았을 텐데 엉뚱한 하나님의 도구이자 방법을
숭배함으로 자기만의 편협한 생각에 갇혀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이 교회 아니면 안돼, 나는 이 목사님 아니면 안돼, 나는 이 사역 아니면 안돼, 나는 이 사역 아니면 안돼라는 고집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상을 놓치고
빼앗기게 됩니다.
모든 육체의 마음에 대해서 그들은 종결을 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끗해지는 것이 성장입니다. 그것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
발전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해도 육체의 마음에
버려지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성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고 있던 일을
그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원상태로 고스란히 돌아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꾸고 도구를 바꾸고 지역을 바꾸고 사람을
바꿀 것이 아니라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목표를 바꿔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말씀처럼 철이 철을 빛나게 만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빛나게 만듭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것 같으면 결코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디와
힘줄의 공급함을 얻어야 연합하여 자라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 번째, ‘절정’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방법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입니다. 이러한 은혜받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육체의 마음에 대해서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그것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버렸습니까? 저는 우리들은 다 버린 줄 믿습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것과 육체의
마음을 따르는 헛된 과장됨을 추구하지 않는 줄 믿습니다.
과다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과다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과다한 능력을 누리게 된다는 등의
광고는 모두 헛된 과장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마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들을 때에만 성장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붙들고 계신다면 거기에 마디와 힘줄로 연합해야만 성장이 진행됩니다. 마지막으로 마디와 힘줄과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의지해야 성장이 완성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만 자라납니다. 다른 유로는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네 번째, ‘결말’을 볼 수 있습니다.
“[골]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 때 자라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내리며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디와 힘줄인 그리스도의 성도들과 더욱 연합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성장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장하였다면 어떤 시험도 이겨낼 것이고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있을것입니다. 늘 평안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자라나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자라나서 주님 앞에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