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수많은 시험을 보았습니다. 매달 한번씩 찾아오는 국영수 시험과 학기별로 두 번씩 봐야 하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늘 긴장과 불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쯤이면 더 이상 시험을 보지 않게 될까?’그런 생각은 대학교가면 사라질 것 같았는데 대학원을 거쳐 졸업을 하고
나니까 더 이상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양상이 바뀐 새로운 시험이 다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찾아오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시험은 결국에 인생에서 시험이란 항상 따라다니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신앙으로서
믿음의 시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어떤 왕성한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신앙생활의
위기를 맞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전 시험에서 1등을
했다 하더라도 다음 시험에서 꼴등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전에는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다음에는 꼭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1등을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이전에도 노력했던 것처럼 다음 번에도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뒤쳐지는 일은 없습니다. 시험은 계속되고 이에 대응해서 준비도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잘 넘어갔다 하더라도 사탄은 또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은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5절의
말씀은 ‘이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마]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헬라어로 ‘tote’라고 말하는 이 말은 ‘그리고 나서, 바로 그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이
끝난 뒤에 또 다시 시험이 시작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간고사 이후에 기말고사가 있는 것처럼 한 시험이
끝난 뒤에는 다른 종류의 시험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의미에서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계십니다. 이 두 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이렇게 유혹합니다.
“[마]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높은 곳에
세우고 뛰어 내리는 말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뛰어내려 보라는 것은 사탄의 시험이 어떤 류의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사탄은 결코 모든 일을 억지로 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힘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의가 아니기 때문에 죄로 정죄되지도 않습니다.
사탄의 방법은 더욱 진보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부추키는 것이며 하지 말라고 해도 더욱 그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뛰어 내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려보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실 테니 무슨 걱정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존심과 감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자극하는 사탄의 수단은 실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러한 자극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그 말을 따릅니다. 전혀 밀지 않았는데 스스로 뛰어 내립니다. 높은 곳에 세워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를 높은
곳에 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들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하기 때문에 그 높은 곳은 꿈을 성취하고 목표를 이루고 평안하고 잘되고 형통한 삶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 사탄은 우리를 세우고 그 다음에 뛰어 내려보라고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 인용을 통해서 더욱 그것이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 처럼 만들어서 뛰어내리라고 제안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하는 성경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정확하게 뛰어내림과 관계있어 보이는 말씀을 끄집어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이 말씀은 시편 91편 11절부터 12절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시]91: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91: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지만
그 말씀은 결코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것과 관계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걸어갈 때에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보호시며 지키시고 피난처가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이지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인생에서 모험을 감행했을 때 그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사탄은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제 사탄이
바로 우리에게 주는 시험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험을 강행하라고 있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한 투기와 횡재의 기회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혹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에서 절망하며 쓰러져 버릴 것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보다 더 나빠지겠느냐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뛰어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을
때에는 오히려 더 큰 신앙으로 우리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인 모든 내용이 사탄의 목적과
합리화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이 자기의 만족과 유익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럴 때 성경말씀은 너무나 잘 들어맞습니다. 잘 들어맞추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만 이러한 기술은 무척이나 교묘해서 잘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 앞에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금씩 다른
양상을 가지고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너 자신을 위해서 살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항상 넘어지고 쓰러지는 이 시험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또 어떻게 그 시험을 이기셨을까요? 주님이 이러한 류의 시험을 이겨내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그 방법을 따른다면 우리에게도 승리가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이 사탄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마]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 아닙니까? 좀더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말하거나 적극적으로 변론과 항변을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그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하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말로는
부족합니다. 진정한 의미는 그 속에 더욱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나를 시험치 말라라고 말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시험받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사탄의 유혹의 핵심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대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받아주시는가 안받아주시는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대로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다가는 혹은 그것을 고민하다가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를시험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하나님의 ‘공의’를 시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이 전부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의미는 예수님이 [나를 시험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지 않게 하는 정도라면 그분이 무서워서 혹은 두려워서 혹은 귀찮아서 시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주님을 시험합니다. 사탄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은 참된 나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사탄은 계속 시험합니다. 그는 고소하는 자요 참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그분은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환경을 받아들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냥 그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유사한 시험으로 우리에게 시험합니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렇지만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생각은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받아들였고 높은 곳에 서 있게 되었을
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높은 곳은 때로 위태한 곳이기도 하고 절박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 백척간두 같은 곳에서 견뎌내었을 때의 마음은 오직 ‘주 나의
하나님을 시험치 않으리라’는 결심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만 두고 싶을 때, 혹은
절망하고 싶을 때, 혹은 하나님께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 마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마음으로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분이셨고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도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주님이
점차 다가오십니다. 그 날을 기억하고 바라보며 더욱 견디어 내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