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지난 주 전교인 수련회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잘 마쳤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주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였습니다. 특별히 수련회에 참가하신 분들은 수련회 기간 내내 듣는
이야기가 되었고 아주 익숙해졌겠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련회는 끝났지만 그 이후로 계속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제에 대해서 이미
들은 분들이 다시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좀더 발전된 내용으로
새롭게 말씀을 살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은 사람들에게나 혹은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모두
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 속에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우리가 12장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말씀을
보았고 거기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주제를 따왔지만
고린도전서 1장부터 성경은 우리에게 본질적인 교회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에베소서에 비하면 고린도전서에서는 그 의미가 약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음미해보면 더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문제를 대응하는 해결방법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문제들을 보면 지금의 교회의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안에 있던 여러가지
문제들이란 다음과 같은10가지였습니다.
1)교회안의 분열과 분쟁문제 (1:10-2:16)
2)십자가도에 대한 오해문제 (1:18-2:5)
3)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문제 (2:6-16)
4)근친상간과 그 해결방법의 문제 (5:1-13)
5)세상법정에 소송하는 문제 (6:1-8)
6)비도덕적인 탈선과 음란의 문제 (6:9-20)
7)결혼문제와 이혼문제 (7:1-40)
8)우상의 제물에 대한 불경건의 문제 (8:1-11:1)
9)공예배에 대한 절차의 문제 (11:2-14:40)
10)부활의 교리에 대한 의심의 문제 (15:1-58)
이러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의 본질과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교회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테소스를 연결하는 곳으로 에게해와 아드리아해에
접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자연히 상업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였고 매춘부들로 이루어진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도 있어서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역시 여러가지 세상의
문화와 관습에 영향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고 부모님때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의 기억이 생생하고 그때에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고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했다는 것이 자세히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현재 더 타락하고 더 변질되며 더 부유하고 더 발전된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결코 공통적인 지혜나
경험이나 문화의 총합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성도일 뿐입니다. 그
성도들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결국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그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도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말은 우리 교회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우리도 역시 세상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도전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느냐 입니다. 그냥 무시해버리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 도전에 대해서 응전해야만 합니다. 우리 주변의 교회와 성도들이
분열과 분쟁, 복음에 대한 오해,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 근친상간, 음란, 소송, 외도, 이혼, 불경건
등등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상적인 침투와 영향력 속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겠습니까? 그 핵심은 바로 가장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핵심을 붙들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균형잡힌 위치에서 넘어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을 오늘 말씀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가 아니면
지혜로운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하나님의 능력인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온전한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몇달 전에 중국에 갈 일이 있어서 공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출국수속을 밟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동 출입국심사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면서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이 간단한 등록 한번이면 출국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이번에 이용하고 싶어서 등록을 해보았습니다. 등록하는 곳에서
가지고 있던 전자여권을 스캔하고 손가락 지문을 등록하고 얼굴을 인식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쳐다보고만 있으면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등록한 다음에는 자동출입국심사대에 가서 여권을 올려놓고 지문찍고 얼굴만 보이게 하고 있으면 출입국 심사가
완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편리하고 안전한 절차가 어디있겠습니까?
하지만 범죄자들과 도망자들에게는 세상없이 무섭고 두려운 절차였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으로는 영화에서 나오듯이 위조한 여권과 위장한 얼굴로 다른 사람 흉내를
내면서 입국을 하거나 출국을 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신앙을 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믿음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혹은 자녀가 혹은 친구가 우리 자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을 결단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을 보여드릴
때에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옳다 인정하시고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허락해주십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의 핵심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못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바라보게 하면서 그분을 닮게 하면서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입니다. 23절입니다.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들이 증거한 것은 십자가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이자 수치스러움였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했는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들은 적이 없고 믿지도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거리끼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미련하게 생각하는 이방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게 하셨을까요? 구원을 얻게 하실 때 왜 인간의 노력과 헌신과 열정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해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혜이자 능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공로나 자랑이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잘 차려놓으신 구원하심이라는 밥상에 인간의 밥숫가락을 올려놓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수저만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 수저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구원이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수단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이유는 바로 그럴 때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임금님이 그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마]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님은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원래 초청하기로
한 자들을 초청하였으나 그들은 혼인잔치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그들은 임금님의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임금님의 종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군대를 보내어서 그들을 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종들로 하여금 새롭게 사거리 나가서 사람들을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혼인잔치에 어떤 사람들이 왔는가 보려고 잔치자리에 들어왔습니다.
“[마]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을 보니 그는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예복을 입고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였지만 그는 ‘잔치’에는 왔으나 ‘혼인’에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을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오직 잔치를 즐기려고 할 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이렇게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그 사람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는
오직 잔치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지 ‘하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것이지 ‘잔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할 때 세상의 나라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잔치’만을 기대할 때에 우리는 ‘혼인’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분열과 분쟁, 복음에
대한 오해,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 근친상간, 음란, 소송, 외도, 이혼, 불경건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닮을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이런 저런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는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난 문제를 가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애시당초 생기지 않도록 할 때에 비로소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할 때에 우리가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셨습니다. 바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해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으니까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더 놀랍게 구원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하는 것이 스스로 발견해서 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이었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라는 사람은
아메리칸 인디언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인디언 선교의 뜨거운 열정을 주셨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그는 1742년도 부터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뉴욕의 카우나우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통역자를 만나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어려움은 매우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외로웠고 음식도 없었고 영적인 즐거움이나 보람도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롱 아일랜드의 한 교회와 기타 다른 여러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위로할
세상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싫어하신다면,
그 도시의 즐거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계신 곳이라면 한가한 시골에서
한 시간 지내는 것이 온 세상과 평생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었을 때 인디언들에 비로소 복음의 은혜를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뉴저지의 크로스웍승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30명 정도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고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임재함으로 인해 은혜의 눈물과 울부짖음과 애통함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인디언 선교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닮은 자였습니다. 그로 인해 놀라운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음을 나타내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분위기나 역사나 문화나 전통이 아니고 자기 시대에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애쓰며 닮아나가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백마디 말보다 더 명확하고 천마디의 표현보다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분의 몸이고자 할 때 우리는 사변적이 되지 않고 공상적이 되지 않고 현실에 근거하면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됩니다. 또한 그러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들로 인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들도 변하여져 가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