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까지 이번 한달동안 우리는 덕행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이렇게 덕을 세우는 것이 우리의 특별한 목표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도 덕행을 행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여러가지 덕목 중에서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서 덕행을 살펴봤다고 해서 덕행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실천을 행할 수 있습니다. 덕행은 그중에 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 시간으로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에서 덕을
행하는 것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속에서 덕을 행하는 실천들에
대한 권면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그 최종목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4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발단-전개-절정-결말’이라는 4가지 극본적
구성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어볼 때 시작이 되는 발단은 1,2절
두 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구원에 이르는
성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베드로는 모든 악독와 모든 궤휼과 모든 외식과 모든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시고 구원을 얻은 자로서 버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악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버릴 때에 비로소 새로운 것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어서 갓난 아이들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빠는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이 덕행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모든 덕행의 시작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하게 하는 것. 그럴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게 됩니다. 여기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자라나게 됨을 의미합니다(in your salvation/ thereby / in respect to salvation). 자라나서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로서 그 모습이 온전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성장으로의 시작을 촉구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시작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사모할 것을 사모하도록 권면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권면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덕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체중감량을 제안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혈압이 높거나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거나 기타 이런 저런
건강상의 이유로 몸무게를 줄이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를 해야 하는데 이전에 하던 일을
하지 않아야 하고 새롭게 해야만 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과식이나 폭식을 하지 말아야
하고 운동이나 산책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서 하나만 하면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이 둘이 함께 되어질 때에 비로소 체중감량이 진행됩니다. 이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일이 성공하게 되어서 원하던 체중에 이르게 될 때에 여러가지 기쁜 일이
생깁니다. 얼굴이 달라지고 몸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생활습관이 달라지게 됩니다. 아무도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덕행으로의 시작도 이와 같습니다. 변화된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새로운 일의 시작은 당연하게 그 다음 단계를 거칩니다. 바로 전개의 과정입니다. 본문 말씀도 전개에 해당하는 단락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악행을 버리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덕행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존경받는 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해진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의 행위로 인해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로 옷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앞세워서 주님앞에 나아가는 것이지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덕스러운 행동도 그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일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에 있는 종합 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이 설립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와이드너는 부잣집의 아들로서 1907년
하버드를 졸업한 졸업생이었습니다. 그런데 5년 뒤 부모님과
함께 타이타닉에 승선하였습니다. 행복할 것 같던 크루즈 여행이었지만 타이타닉의 결과처럼 슬픈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면서 와이드너와 아버지가 최후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어머니는 아들의 하버드 사랑을 떠올리며 모든 재산을 아들의 모든 책과 함께 하버드대학에
기부하였습니다. 그렇게 설립된 것이 바로 와이드너 도서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고 합니다. '하버드 입학생은
졸업 전까지 25M 이상 수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버든 대학은 도서관의 소유권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구조선이 도착하기 바로 전에 수영을 하지 못해서 목숨을 잃은 아들을 안타까워했던 것입니다.
아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많은 학생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아들의 허망한 죽음을 달래기 위해서 학생들은 수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재학생들이 수영하는 모습은 그 어머니에게는 어떻게 보여졌겠습니까? 바로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는 모습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때문에 덕을 행하는
우리들을 받아주시고 제사장으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행된 덕행의 과정이 정말 최고의 절정을 맞이하는
부분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여기서 모퉁의 머릿돌이 되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의 건축방식이
모퉁이에 머릿돌이 놓아진 다음에 그 돌을 기준으로 양쪽 벽이 세워지는 방식이기 때문에 모든 건축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믿지 않는 자들과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건축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자기들 중심으로 건축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중심으로 건축하려고 할 때에 예수님이라는 머릿돌은 항상 방해되고 불편하고 버리고 싶은 존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고 예수님을 거부되고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은 바로 그분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자신의 삶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고 그러한 자들을 주님을 받아주셨으며 그 모든 완성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핵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덕을 세우는 목표도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덕을 세운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도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에나 끝이 났을 때나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있을 수 있었고 예수님이 우리를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시대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냥 죽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사랑을 나타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뇌성마비 아들을 위해서 철인 3종경기에 출연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을 감아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결국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로 혼자 움직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의사는 아이를 포기하라고 했지만 부모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는 컴퓨터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와 함께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8km 달리기를 마친 후에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처음으로
제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후에 아버지와 아들은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하여
완주합니다. 그리고 철인 3종경기에 나가고 싶어하는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수영과 싸이클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태운 보트를 배에 묶고3.9km수영을 하고, 아들을 태운 자전거로 180.2km를 달리고,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49.195km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모두가 다 도착한 이후였지만
그들은 마침내 완주했습니다. 아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면 할 수 없었어요.’ 이에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도 달리고 있었습니다. 올해 2014년 보스턴마라톤에
다시 나와서 완주를 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놀라운 사랑속에서 그들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모든
피와 우리를 위해서 겪으신 모든 고통이 바로 우리에게 대한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고 그분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의 결말은 나머지 9절 한절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결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덕의 나타남’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모든 덕행의 최종 결말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서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의 덕을 나타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나타내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셔서 마침내 최종적인 모습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난 우리의 모습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덕을 찬양하고 선전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덕은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과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고 견디어주신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그 아름다운 덕은 우리의 무지함과 부족함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 하셔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은혜를 나타내는 자들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덕을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통해서 최고의 미녀가 뽑히게
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용실 원장님께 감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감사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신 성형외과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전에는 화장이나 미용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수술과 치료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주니 말입니다. 우리가 덕을 이루게 되고 그로 인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덕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덕을 따라하는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운동선수가 함께 수고하고 애써주신 코치님에게 감사를 돌리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끝나게 될 것을 기억하면서 지금부터
또다시 덕을 세워나가는 일에 열심을 다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덕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놀랍게 바꾸실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한번 덕을
세우며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