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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온유] 48갈6;1-2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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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1-2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_1

 

 2014.8.24..주일오전.

 

*개요:    72온유, 3분석, 5은혜-7실천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온유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대할 때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항상 온유함은 사람을 상대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모세에게서, 기드온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어렵고 힘든 사람을 상대할 때 그러했습니다. 거세게 저항하거나 시비를 걸면서 분노하거나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온유함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온유함을 보일 때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의지와 열정이 바로 그 예수님의 온유함을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게 합니다. 그것은 그냥 평안하거나 안락할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이러한 온유함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지 다른 사람이 내게 찾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응해야 될 때에만 나타나는 수동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상황에서도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옳고 진실한 길로 인도하려고 할 때에 나타납니다. 또한 바르지 않거나 악한 모습이 있는 사람에게 대해서 그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려고 할 때에 이 온유함이 나타납니다. 올바르게 하려고 할 때에 온유함으로 대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를 모든 선함과 의로움으로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방법으로 대하지 않고 선한 방법으로 대합니다. 오늘 말씀이 이야기 하고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어떤 사람에게 범죄한 일이 일어났을 때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더욱 범죄함에 빠지지 않도록 올바르게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 올바름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그럴 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가 아니라 강퍅해진 마음으로 과격한 마음으로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더욱 안좋게 될 뿐입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의로운 방법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솝우화에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우는 자신의 생일날, 옆집에 사는 두루미를 초대했습니다. 두루미가 문을 똑똑 두드리자 여우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여우아, 생일 축하해!" "고마워, 어서 들어와!" 여우는 두루미를 식탁으로 안내했습니다. 식탁에는 콩국이 담겨있는 납작한 접시가 있었습니다.

'두루미야 어서먹자!" "그래 맛있겠다" 여우는 혓바닥으로 국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두루미는 접시에 부리를 쿡쿡 찍기만 하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먹은 여우는 두루미에게 말했습니다. "왜 못먹고 있니? 입맛이 없나 보구나. 내가 먹어도 될까?" 여우는 두루미의 콩국까지 모두 먹어 버렸습니다. 두루미는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며칠 후, 약이 바짝 오른 두루미는 여우를 초대했습니다.

"어서와, 맛있는 생선국을 준비했어." "고마워" 여우가 식탁으로 가보자 식탁에는 목이 긴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 여우야 어서 먹자" 두루미는 긴 부리를 병 속에 넣고 잘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우의 뭉특한 주둥이는 병 속에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결국 여우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여우는 왜 두루미를 초대하였으면서도 그를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또한 두루미는 왜 여우를 초대했으면서도 그를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올바름을 가르치기를 원한다면 거기에 맞는 올바른 방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온유함은 바로 그런 올바름을 나타내는 모습이 됩니다. 온유할 때에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셨는데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 뿐입니다. 그 온유하심을 따라할 때 우리는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1...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왜 어떤 성도가 범죄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그를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내 자신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왜 내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것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어서 범죄함에 항상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쉽게 분노할 수 있지만 그렇게 분노하게 되는 그 분노함으로 인해서 사실 우리 자신이 유사한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범죄함은 항상 시험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험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시험을 받을 때 그 시험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범죄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온유함으로 범죄한 자를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그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워하면서 경각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놀이가 많아지는 여름철에는 물놀이 사고가 항상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에서 대개 일어나는 일들은 물에 빠진 누군가를 도우려다가 돕지도 못하고 함께 물에 빠져버리는 일들입니다. 또한 다행히 다른 사람은 구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일 다행스러운 경우가 다른 사람을 물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자신도 그 물에서 빠져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되려면 항상 자신이 빠져나오는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서 구조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당장 눈앞의 필요만 생각하고 물에 뛰어 든다면 함께 물에 빠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은 건져내지만 자기 자신은 나오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허파에 물이 차게 되면 더이상 호흡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온유하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강퍅함입니다. 강퍅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분노의 감정이 차 올랐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흥분해 버려서 감정에 휩싸일때 결국에는 온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건 말하자면 물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 감정으로부터 피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온유함을 유지하고 그 감정에 빠져서 범죄하고 만 그 사람을 감정으로부터 인도해 내라고 하였지 강퍅함에 빠져서 그 사람을 끄집어 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같이 그 범죄함에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말리려고 했지만 같이 싸우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격려해주려고 했다가 도리어 책망만 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해 주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더 분란만 일으키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불을 끄려고 했다가 오히려 더 불을 지피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경우가 온유함으로 옷입지 않고 온유함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결국에는 동일한 시험에 빠지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할 때 함께 물에 쓸려가지 않도록 우리가 줄로 든든히 우리 자신을 맬 수 있다면 안전하게 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맬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2절을 읽어봅시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을 지는 것은 앞에서 나온 그 범죄한 성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의 연약함과 그의 완악함과 그의 강퍅함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모든 악한 것들은 짐이 됩니다. 그는 자기 앞가림을 잘 하지 못했고, 무책임했으며, 경솔했고, 자기의 의무에 소홀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안좋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런 일들은 모두에게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고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번에 모든 것을 잘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려주고 인내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짐을 서로 지는 자들입니다. 한 사람이 그 모든 짐을 다 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 짐을 지고자 할 때에 우리는 범죄함으로부터 한 영혼을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무의미한 수고가 아닙니다. 그렇게 애써 합력하여 짐을 지었기 때문에 바로 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짐을 지고 용납하고 도우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예수님께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짐을 주님이 지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님의 멍에를 매게 하시지만 그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짐을 내려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짐을 주님께 다 지시고 나아가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예수님은 그 희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범죄한 자를 의로운 삶으로 붙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할 때 구명줄을 던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최근에도 한 초등학생이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환을 던져주어서 살아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법에 의존 할 때에 비로소 성도의 영혼을 사망이나 범죄함에서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갈라디아서의 본문은 특별히 우리가 지난번 전교인수련회에서 묵상하기도 한 본문 말씀이었습니다. 주제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는 것이었고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체적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주제는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성취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았고, 그속에서 6 1,2절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내치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늘 거기까지만 이르기를 원할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원하시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은 범죄한 자를 다시 의로운 자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온유함을 가지고 함께 짐을 지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은 모든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듭니다. 그 법은 범죄한 자를 의로운 자로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를 다시 하나님에게 가까운 자로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취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의 법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도 역시 짐을 지셨습니다. 그 자신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그 이전부터 군병들에게 맞고 고통당하셨던 주님이 지시기에는 체력적으로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질만해서 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져야 하기 때문에 지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었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한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자신이 먼저 솔선해서 우리에게 온유함과 희생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삶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희생은 어쩌면 멀리 여겨질 지도 모릅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바로 3주전에 전교인수련회를 통해서 여러번 읽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유함으로 서로의 짐을 지라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쉽게 와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에 온유함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교회생활에 온유함이 필요하고 가정생활에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온유함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범죄한 자를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바로 잡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또다시 실족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빛되신 주님의 방법이 아니고서는 빛되신 주님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한번 그 말씀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목표가 되어서 온유함으로 무장되고자 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뜻을 나타내고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웰링턴제독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800년대에 영국의 군인으로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물리친 공을 세운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제독이 한번은 상습적인 탈영병 부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선고 직전에 말하기를"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보았다. 채찍을들어 너를 때려도 보았고 노동도 시켜 보았다. 굉장히 심각한 벌도 주었다. 그러나 너는 돌이키지 않았고, 새로와지지도 않았다. 별 수 없이 너는 죽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지혜로운 웰링턴제독 부하 한 사람이 제 독에게 나와서 건의를 했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아직 이 사람에게 한가지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각하는 이 사람을 용서해 보신 적이 없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독은 이 지혜로운 부하의 충고대로 무조건 용서를 해 주었는데 놀랍게도 그 후 이 사람은 변했고 다시는 탈영도 하지 않았으며 웰링턴의 충성스런 부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놀라운 승리의 핵심은 바로 부하에게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방법만 나타낼 때에는 결국의 우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전부이지만 예수님의 방법을 따를 때에는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게 됩니다. 온유함이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속에서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대해 보십시오.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뜻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속에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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