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리더의
종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카리스마(charisma)형과
설번트(servent)형 리더쉽입니다. 카리스마형은 흔히 주도적, 저돌적, 은사적인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번트 형은 섬김과 온유와
돌봄의 리더쉽입니다. 이 둘은 상호 배치되는 리더쉽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상호보완적이기도 합니다. 카리스마형만으로는 결코 성공하는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설번트형만으로도
뭔가 부족합니다. 이 둘이 적절히 보완을 이룰 때 온전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실제로도 둘 중 하나에 더 많이 치중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하나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카리스마적인 기질이 있으면서도 돌봐주고 신경을 써주는 리더가 진정한 성과를 거둡니다. 또한 설번트처럼 섬기면서도 적절히 주도적이고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역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았던 충성스러움은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충성스럽기만 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고집스러울 수 있습니다. 혹은 완고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기 중심적일 수도 있습니다. 충성스럽기 때문에 그 충성스러움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좋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충성스러움에도 무엇인가가 있어야 극단적인 모습이
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온유입니다.
충성과 온유는 리더쉽의 유형에서 나타나는 카리스마형과 설번트형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충성스러움과
온유함이 균형을 가질 때 비로소 온전한 리더로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덕목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리더가 되기 위한 모습이 아니라, 신앙인의 모습을 갖게 하기 위한 목표가 됩니다. 리더란 어차피 특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과 온유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제 충성스러웠으면서도
온유함이 있었던 사람으로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충성스러웠습니다. 또한 온유했습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이 그에게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된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움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나님은
모세의 충성스러움에 대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상으로
말씀하시거나 혹은 꿈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거리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그러한 거리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보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직접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충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과는 자꾸 이야기하고 싶은 법입니다. 더 신뢰하고
믿기 때문에 더 많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충성스러웠으면 사실 강퍅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돌아서면 그는 모든 전권과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그 충성스러움에 대통령이 정말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청와대 밖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까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하며 얼마나 기세등등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그 자신의 충성스러움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자신감이자
명예의식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충성과 온유는 별로 연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온유했습니다. 성경은 다시 그의 온유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는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높은 온유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충성스러움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온유함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온유함에 대해서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평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온유함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온유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성격, 태도 따위가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따뜻할 온(溫)자와 부드러울
유(柔)자를 써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온유는 헬라어로πραότης (praotēs) 라고 하고 영어로는 ‘gentleness, meekness’라고
합니다. 이 온유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앞에서 보았던 충성스러움과는 또 전혀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온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부드러움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모세의
온유함은 그를 소개할 때 나타난 말이 아닙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한 이
말은 사실 그가 가장 온유하지 못할 때에 나타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평상시에 온유함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고 자신을 거역하여 극도로 격동시키는 자들이 일어난 바로 그때에 온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상황에서의 온유함에 대해서 성경은 모세를 온유하다고 평하였던 것입니다. 그 상황은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앞절부터 시작됩니다.
“1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의 본처는 십보라였지만 그 이외에 다른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덕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미리암과 아론은 여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바로
모세의 리더쉽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은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것은 단지 모세의 가정생활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그로 인해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부르심과 모세의 지도력과 모세의 신앙생활까지도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모세가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달하는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지시는 자기들도 받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일을
시작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가족이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갈대상자에 눕혀져서 나일강에 띄워졌을
때에 따라가면서 감시하였던 모세의 누나였습니다. 아론은 모세가 바로에게 갈 때에 그가 말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대신 내세웠던 모세의 형이었습니다. 비록 이일이 가족들간에 일어난 분쟁이기는 하였으나
미리암과 아론이 말했던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나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동일하다고 한 부분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실이 아니었고 또한 그로 인해서 모세의 지도력을 믿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모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면서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서 강하게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미리암과 아론은 비록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냥 놔둘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동원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은 바로 ‘정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문열씨가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소설을 보면 초등학교
교실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상황이나 배경은 순진무구하고 낭만으로 가득할 것
같은 초등학교이지만 그속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성인정치를 능가하는 회유와 설득과 포섭과 압력 등 모든 정치적인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밀고 당기고 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초등학교입니다. 그 전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알지 못했던 것들이 바로 초등학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초등학교 생활 속에서 온유를 배울 수
있고 혹은 온유를 배우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중고등학교 생활은 이미 가지게
된 모든 마음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입니다. 학업적인 압박과 스트레스 속에서 잠시 주춤할 수도
있겠지만 학업의 목표가 사라져버리거나 약해졌을 때에는 인간관계의 문제는 더할 나위없는 괴로움이 시작되게 됩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정치로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온유함이란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내어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다보니 그 스스로 감정적으로 문제를 대응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였는가를 보여주십니다.
“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의 온유함은
바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순간 순간 강퍅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는 감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다림과 참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과 심판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4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세 사람은 전부 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모세에 대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비난과 부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러한 아론과 미리암에 대해서 온유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세에게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론과 미리암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세의 구스여자를 취한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아론과 미리암의 주장이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해서 모세의 부르심과 모세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후
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벌을 내려서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하얗게 그의 살은 썩어들어갔습니다. 사람같지 않은 상태로 변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대면하여 말씀하시던
모세에게 대해 비방하며 그 권위를 부정하던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것입니다. 아론도 이렇게
되어버린 미리암을 보며 자신들의 일을 후회하며 괴로워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과 악을 구분해 주셨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아론은
슬퍼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모세의 온유함이 나타났습니다.
“13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모세는
미리암의 병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고쳐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미리암을 다시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칠일동안 진밖에서 나가 있게 하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을 미리암을
기다렸고 칠일이 지났을 때 미리암의 병은 사라졌고 그는 다시 정상으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크고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던 문제였지만 모세가 온유함으로 그 문제를 대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될 지를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대처해야
하는 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유함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온유함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온유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평상시에는 더할나위 없이 온유합니다. 하지만
갈등의 순간과 감정적으로 자극이 되는 순간에는 보통 사람들보다 배나 더 흥분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더 망가뜨려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온유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온유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반대로 평상시에는 그냥 성격이 보통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가장 문제와 갈등이 증폭된 순간에 그는 온유하게 그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면 그는 온유한 사람일까요, 온유하지 못한 사람일까요?
진정한 온유함은 평상시에 괜찮을 때 편안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유하다기
보다는 그냥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어렵고 괴로울 때 온유하다면 그것은
진짜 온유한 것입니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습과 태도는 모든 긴장과 불안과 분노와 격정을 다 잠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만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새롭게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모세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이전에 자기를
떠나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던 마가요한을 제외시킵니다. 그는 충성스럽지 않았던 마가요한을
다시 2차 전도여행에 합류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바나바와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자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결별된 관계는 그렇게 끝나는가 했지만 바울은 다시 마가요한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를 부릅니다. 디모데후서4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딤후 4:11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진정한
온유함은 하나님 안에서 돌아오는 자를 품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붙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새로 깨끗하게 시작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온유함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의 모습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자는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 온유하게 대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온유함을
사모하고 이 온유함으로 여러분의 삶이 채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대면함 속에서 그분의 세우심을 받게 되고 그래서 또 발전하게 되는 놀라운 교제와 교통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