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여름날씨는 여러가지 면에서 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에는 아무 것도 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많은 일이 있고 해야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뜨거운 날씨를 무릅쓰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힘을
내어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더운 여름이라고 해서 해야할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감당해야 하는 일을 감당하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날씨의 어려움이 매년
여름과 겨울에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며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맡은 일에 대해서 충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충성이란 이렇게 해야하는 일,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맡은 자에게는
책임감이기도 하며 의무감이기도 합니다.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목표이자 사명이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리이자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충성스러운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을 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이러한 충성스러운 삶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성스러운 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스러울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단지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간구할 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을 목표로 해서 간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해서 충성할 때에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알아서 주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덤으로 더욱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충성스러움에 대해서 지금까지 여러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여가생활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 하는 것이 충성이고, 자신의
발전이나 유익과 관계된 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우선시 하는 것이 충성이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보다도
더 하나님을 중시 여길 때 그것이 바로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충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충성스러움도 물론 대단한 것이지만 성경 속에는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충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키는 것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지 않은 것까지도 하는 충성입니다.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충성스러움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그 충성의 최고수준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았고 시키신 것도 아니었지만 알아서 자원해서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충성했던 자를 진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를 칭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그 충성스러움을 기뻐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충성했던 자는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4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한다고 했느냐? 네가 정말
그런 말을 했느냐?’ 주님은 너무나도 기뻐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충성스러움을 알고 계셨지만 이렇게까지
충성스러운 것은 한없이 기쁘신 일입니다. 왜 하나님께 대해서 그의 이런 모습이 기쁜 것일까요? 왜냐하면 다윗은 지금은 행하라 명한 일을 다 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행하라고 하지 않은 것까지도 행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이 이어집니다.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은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천지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담은
언약궤는 성소에 있었습니다. 그 성소는 회막, 다시 말해서
천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그 성소를 백향목 집이나 대리석 건축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언약궤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래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격동시키며 우상숭배를
일삼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함을 통해 가나안에 정착한 기원전1390년부터 사울왕을 통한 왕정제도가 시작되는 기원전 1050년에 이르기까지 340년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사사들의 등장은
그러한 그들이 어려움 당할 때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보여주는 것이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더군다나 첫번째 왕이었던 사울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왕으로서 제사장이 되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원칙에 불순종했고, 아말렉에
대해서 불순종했으며, 심지어는 성궤를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이끌고 나갔다가 전쟁에 패하면서 성궤까지 잃어버리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했던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 지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상은 기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의
뒤를 이은 다윗왕은 그러한 말씀을 너무나 잘 지켰습니다. 그는 왕이 된 이후에 하나님의 뜻과 원칙을
지켰고 하나님만을 섬겼고 우상숭배를 멀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기특한 일인데 거기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다는 뜻을 나단선지자에게 알려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뜻을 따르지 않고서는 결코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하나님께 대해서 이렇게 충성스러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중풍병에 걸린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
하인을 불쌍히 여겨서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를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마8: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그 간구를 들으시고 그 집에 가서 고쳐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8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하인을 고쳐주시리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만 하면 중풍병에 걸린 하인이 순종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예수님께서 이방인인 자신의 집에 들어와서 교제를 나눔으로써 유대인의 정결규례를 어기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오실필요가 없이 말씀만 내려달라고 명령만 내려달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한 특별하고 커다란
믿음을 바로 로마의 백부장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이방 사람이든지 가리지 않으시고
자신을 믿으며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따르는 자를 보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전건축이나
혹은 병의 고침으로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보신 것은 단순히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 이러한 충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충성을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행하는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로의 변화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에는 불편하고 힘들고 괴롭지만 그러한 말씀의 의미와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서 깨닫고 나면 힘들이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학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누구보다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삶의 마음가짐은 자신이 결혼한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한 이후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에드워즈와 사라 사이에 11명의
자녀가 탄생했는데 그는 자녀들에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약 1시간에 걸친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경건생활에 대해서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상히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죽은 지 약 150년이
지난 후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의 삶을 연구하였는데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은 모두 873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학총장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회자와
성직자 100명, 군장성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국가 공무원 80명, 국회의원 5명, 미국
부통령 1명, 그리고260명의 진실한 신앙인들로 살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자녀들의 열매는 바로
다윗에게 축복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그대로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여기셨는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지 않는 자들이 그 특별한 축복의 대상자들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더욱 자원하여 하고자 하는 자들이 누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충성스러움이 존재함을
깨닫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은 다윗 처럼 성전 건축에 마음을
다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한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 처럼 하나님이 주신 가정에서 더욱 귀한 열매를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축복처럼 온전히 우리들의 삶 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경우에 그는 끝까지 그렇게 충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말년에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었지만 나중에는 그가 어이없게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나님의 명하신 뜻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삼하11:1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2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왕궁지붕위에서 여인의 목욕하는 것을 보는 장면은 오늘날로
하면 남들은 모르는 은밀한 장소에서 자극적인 경험에 노출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보낸
군대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에 이렇게 어리석은 상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그는 그 여인의 이름을 알아 보았고 그 여인을 궁으로 불러 들였고 관계를 가졌으며 그로 인해서 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임신을 무마하기 위해서 다윗은 남편은 극렬한 전쟁터에 몰아넣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 되어서 이후부터 다윗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지고 늘 쫓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길 때에는 한없는 축복을 누렸으나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자신의
욕구를 따르는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의 노년은 고달프고 괴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그 어떤
것도 경쟁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영향력이나 자신의 발전이나 혹은 자신의 여가생활 조차도
하나님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죄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로 이와같은 충성으로 채워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러한 충성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정말 충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더욱 충성하시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마음속에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삶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복주시는 삶입니다. 세상은 의리로 사는
삶을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