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한 해의 모든 농사가 그 결실을 나타내고 한 해의 수고가 빛을 발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가을에는 추수를 하고 작물을 수확하며 실과를 거둬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지난 번 추석에 들이닥친 커다란 비와 여름에 내린 큰 비는 조금만 지나면 수확을 하기로 한 많은 농부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는 TV를 통해 한 과일 재배 농장에서 비로 인해 떨어진 많은 과일을 보았습니다. 그 고비만 지나면 큰 수확이 되었을 텐데 많은 비로 인해 무참히 떨어져 버린 과일들은 주인의 마음이나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수확하지 못한 열매들의 안타까움은 단지 안타까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번의 배추파동도 다 밭작물에 비로 인해 큰 피해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한 결과를 온 국민이 겪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씨를 뿌렸으면 열매를 맺을 때 보람이 있고 유익이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열매가 없음으로 인해 커다란 슬픔이 되고 또한 커다란 괴로움이 따르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면 뭔가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간의 노력은 다 수포로 지나가 버립니다. 애써서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고 병충해를 막아내고 정성을 기울였더라도 열매가 떨어져 버리면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신앙도 열심히 노력할 때에 비로소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교회를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사역을 하고 전도를 하더라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열매가 맺게 하려고 노력할 때에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이 열매라는 것이 1년 노력하면 다 원하는 결실을 거두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해서는 1년이 걸리지만 사과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기존의 사과 나무에서 접목된 새로운 사과나무는 열매를 맺는데 3년이 걸립니다. 하지만 종자에서부터 직접 자란 사과나무는 열매를 얻는데 13년이 걸립니다. 이처럼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시간이 조금 걸리기도 하고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도 합니다. 꾸준히 노력해서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은 전혀 상황과 환경이 틀립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열심히 부지런히 꾸준히 나아갈 때에 비로소 때가 되면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이런 자세로 이런 각오로 신앙의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신앙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네 가지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열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노력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별로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도 합니다. 평생을 신앙생활을 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원래 의심이 아주 많아서 하나님을 믿게 되기가 천성적으로 어려운 경우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이 흐르다 보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열매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 믿음의 열매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째 열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좀더 쉬운 말로 구원의 확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마음입니다. 믿음 보다 좀더 개인적이고 믿음보다 더욱 구체적이며 믿음보다 더욱 관계적인 것이 바로 이 확신입니다. 단지 구원의 확신 뿐만 아니라 중생의 확신, 응답의 확신, 도우심의 확신, 등등 많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상호적인 친밀성이 바로 이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과 확신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새로 면허증을 따고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운전을 잘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확신입니다. 그 확신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까지도 거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을 믿음 보다 더욱 구체적입니다. 그 구원의 확신에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영혼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확신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그 이후에 맺을 수 있는 열매가 바로 확신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세 번째 열매는 ‘충만’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확신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더욱 정결케 하고 성령을 사모하다보면 성령께서는 그의 마음 속에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구원의 확신 만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 만으로 모든 신앙생활을 다 완성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성령의 충만을 필요로 하게 될까요? 그 때는 우리 마음 속에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미움이나 분노나 절망이나 두려움 등이 넘쳐날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충만할 때에 우리의 감정보다 성령께서 더 커지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에 휩싸여있던 마음이 결심으로 변화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의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자기 감정보다 성령의 충만함이 더 커지기 때문에 감정이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운전면허를 딴 지 7년 뒤에 처음으로 사고를 내보았습니다. 그때는 교회전도사로 빨리 새벽기도를 가야 하겠다는 마음에 조급하게 운전을 하다가 골목길에서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저는 감정에 너무 휩싸여 있다가 사고를 내었고 사고를 낸 뒤에서도 한동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신앙에서도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성령의 충만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경험을 하셨다면 빨리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신앙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오게 될 지도 모릅니다.
네 번째 열매는 이 모든 열매가 다 이루어진 다음에 이루어질 수 있는 최종적인 열매입니다. 바로 ‘감당’이라는 것입니다. 감당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은 ‘일따위를 맡아서 능히 해냄’, ‘능히 견디어 냄’ 입니다. 견뎌내지 못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능히 해내지 못하면 역시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신앙에서 감당이라는 열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확신을 갖게 되고 충만을 받은 다음에서야 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내는 것이 바로 감당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확신이 없다면 충만이 없다면 이 감당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가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수준의 신앙의 열매를 교회생활에 적용한다면 어디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사명감당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전도’입니다. 전도의 책임을 맡아서 그것을 이겨 낸다면 그리고 능히 해낸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명감당’이 될 것입니다. ‘감당’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에 그 열매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도’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만 전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충만’이라는 열매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역’입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감정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확신’에 알맞는 일은 ‘성경공부’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예수님과 개인적인 친밀감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더욱 확신이 커져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에 알맞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일로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앞으로 예배를 드리겠다는 사람은 앞으로 믿음을 가질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확신을 통해 성경공부를 하고, 충만을 통해 사역을 하고, 감당을 통해 전도를 합니다. 각각의 교회활동 속에 필요한 신앙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의 수준에서 가장 필요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열매, 가장 있어야 할 열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있어야 하는 것은 ‘확신’도 아니고 ‘충만’도 아니고 ‘감당’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야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예배를 잘 드리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히브리서에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예배시간에 앉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시간을 보내는 것이지요. 때로는 지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공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낙서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락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을 치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은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른 교회에 갔는데 거기서는 예배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수준이 틀리다는 것을 직감할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이 없고, 한 사람도 조는 사람이 없고, 한 사람도 예배드리는 일 외에 딴 짓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교회의 수준은 상당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 매주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고 매일 철야를 하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고 날마다 모여 전도를 나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수준은 너무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어쩌면 그렇게 신앙적인 열매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이 더 믿음을 갖기 위해서 더 확신을 갖기 위해서 더 충만을 받기 위해서 더 감당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만드는 동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교회가 부럽지 않으십니까? 우리도 그런 교회를 만듭시다. 전반적으로 더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수준이 ‘믿음’을 가져야 하는 단계에 있음을 알 때에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그가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믿음을 갖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사과라는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사과나무를 심고 가꾸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믿음이라는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 믿음이 생기기를 원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어떤 증거도 없을 때에 믿는 것입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을 때에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위해 자꾸만 어떤 증거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선행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내가 믿고 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믿고 싶을 때 그 때가 바로 믿음을 갖게 되는 때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우리는 믿음이 없음을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한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는 믿고 싶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믿음이 없지만 앞으로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왜 그렇게 절박하게 믿음을 구하고 있을까요? 지금은 믿음이 없는데 왜 앞으로는 믿음을 가져보겠다고 부르짖는 것일까요? 그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는 믿음을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가 없었을 때에 그는 믿음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식이 귀신들려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자식을 고쳐보겠다고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해주시니까 그제서야 믿음을 갖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 이유는 뭔가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떤 목표를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가져나오는 문제도 없고 목표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믿음을 가져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삶의 영역 속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와 목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서 그것을 도와달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22절에서는 바로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의 모습에 믿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재차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을 갖게 되어서 이루어진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아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본인은 믿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가지고 싶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강요될 수도 없고 지배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어떤 문제나 목표가 있을 때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가 생겨서 믿음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목표가 생길 때에 믿음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목표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목표를 두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반면 큰 목표가 있었지만 그냥 그 목표를 포기해 버리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믿고 있었을지라도 지금 현재는 믿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포자기하면서 믿음없이 소망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면 그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믿음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자녀를 학원에 보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럴 때 부모는 자녀들이 학원에 가서 열심히 배우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고 싶으면 피아노 학원을 다닙니다. 태권도를 배우고 싶으면 태권도 학원을 다닙니다. 영어나 수학을 배우고 싶으면 역시 영어나 수학 학원에 다닙니다. 학생들은 학원을 통해 그 내용을 배우면 유익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들도 그러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믿음대로 그는 원하는 내용을 배우고 그로 인해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게 됩니다. 부모도 그런 수고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병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병을 고치기를 원합니다. 병원에 가면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아프거나 혹은 자녀가 아프게 되면 얼른 병원으로 달려가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병원에 가서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문제나 한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의지했던 이 아버지처럼 우리도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하시고 할 수 없으면 마십시오라는 막연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와주십니다. 마가복음의 말씀 속에서도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불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자신에게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믿음없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보십니다. 21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들은 귀신들림으로 인해 고통받아왔고 그 아버지는 귀신들린 아들때문에 괴로움을 당해왔습니다. 그 악순환을 끊을 시점은 바로 예수님 앞에 나아왔을 그 때입니다. 하지만 그 놀라운 가능성과 변화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는 여전히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서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대답은 이것입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관두시고 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 반 불신 반을 받아들이시지 않습니다. 오직 온전한 믿음 만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자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누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인가요?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그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목표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어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삶에 놀라운 일을 경험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를 목표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러지 못한 오랫동안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고 온전한 믿음으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1영역-개인]~[0복음-창조]~[5은혜-능력] 1.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열매를 구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는 열매가 필요합니다. 2.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열매는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상황은 하나님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이루려고 할 때입니다. 4.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