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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실천] 47고후11: 23-33 내가 바로 광주리를 타고 위험에서 벗어났노라



47고후11;23-33 내가 바로 광주리를 타고 위험에서 벗어났노라



2009.6.28. 주. 주일오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되면 서로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보고 싶어하기 마련입니다. 뭔가 허전하고 아쉽고 우울해집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실생활에서도 이럴 때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했었는데 혹은 이럴 때 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했었는데 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실감과 아쉬움이 너무 지나치면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기 시작합니다. 안보이는 사람이 보이고 안들리는 음성이 들리고 복잡하고 괴로운 감정이 계속 교차하게 됩니다. 그것은 매우 극한 경우이고 일반적인 경우에는 다시 만나게 되고 연락이 되면서 우울함도 사라지고 아쉬움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이유는 잠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이유는 잠시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잠시 헤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생각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비단 부부나 연인 사이일 뿐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또 다른 사랑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과 애정이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괴로움과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수고하며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은 자신의 죄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세움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일들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그 속에서 눌리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간구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사도 바울이 교인들에 대해서 열정과 사랑이 있었던지 그는 이렇게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그는 성도들이 약하게 되면 함께 약해졌습니다. 성도들이 눈물을 흘릴 때 그는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하게 견뎌낸 것이 아니고 함께 약해졌습니다. 함께 눈물을 흘렸고 함께 아파했으며 함께 걱정했습니다. 또한 누가 실족하게 되면 너무나 안타까워했고 괴로워했으며 힘들어했습니다. 그가 자랑할 것은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인해 약해졌던 것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자랑이었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상호연결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 몸에 난 작은 종기가 몸 전체를 괴롭게 하는 것처럼, 혹은 충치하나가 온몸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한쪽 다리가 다치면 온몸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바울과 성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함께 아파하며 함께 괴로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약함이 더 빛이나는 이유는 그 자신이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신도 너무나 괴로운데 그 자신도 너무나 아픈데 자기도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보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더 안타까워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했던 것은 그가 신학자요 전도자요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만이 아니고 그가 또한 참된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아픔에 함께 약해지는 자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사랑의 사도가 되었을까요? 예전에 그는 성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자가 아니었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그를 시기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돌팔매질 하는 자들의 옷을 맡아주던 자가 아닙니까? 그렇게 완고하고 편협하며 강퍅했던 자가 어떻게 이렇게 변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그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 속에서 우리들도 바울이 그래서 그렇게 성도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자가 되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해답이 32,33절에 나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손에서 벗어났노라"
난데없이 왜 그가 다메섹에서 겪었던 일이 나오는 것일까요? 왜 그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요? 바울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는 설명합니다. 왜 내가 그렇게 성도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성도들을 통해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혼자서 자기가 광주리를 타고 그 줄을 붙들고 내려가서 왕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럴 재주도 없었고 설사 재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직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 위험에서, 왕의 손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군병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도와주었을까요? 그를 도와준 사람들의 정체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23절부터 25절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위협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혼자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누가 죽음 앞에서 오히려 더 죽기를 자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도 인간인지라 위협 속에서 두려워하였고 절망하였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입니다. 그들의 도움을 통해 사울은 죽음의 위협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림으로써 그는 자유가 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다른 곳에서 더 많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성도들에게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비록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광주리에 담아 내린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로 그들은 아니었지만 항상 자신을 삶의 위기속에서 달아 내려주는 성도들을 생각했습니다. 위기속에서 살아있게 하는 자들이 있음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빚진 자로 한없이 사랑하였고 한없이 아파하였고 한없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일이라면 그는 항상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의 말은 진실로 사랑의 말이었고 감사의 말이었으며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은 지금도 옥에 갇혀있고 고린도교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러한 애정과 열정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떠날 수 없었을 것 같았던 교회를 떠나서 미국에서 몇개월동안 소속이 없는 목사로 살아보았습니다. 미국생활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갈 때에 늘 제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었던 것은 우리 신형교회였고 여러분들이었습니다. 전화로 성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랬고 혹 연약해진 자들이 있었을 때에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문득 누구보다도 이기적이었던 제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지난 세월동안 어려웠던 우리 교회를 힘들게 지켜준 여러분들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기도해주고 함께 예배에 나와주며 함께 봉사하고 함께 울고 웃었던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10년전 개척의 소명을 받아 엉겁결에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부족한 저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어려워질 때 힘내시라고 말해주시고 교회에 사람이 필요할 때 제가 돕겠다고 나섰던 여러분들 덕분에 우리는 늘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우겨쌈을 당해도 우리들이 서로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묶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연단안에서, 그분의 계획안에서 저는 지난 세월들을 지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감히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여러분들은 어떠했습니까? 과거의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여러분들의 고통 속에서, 여러분들의 위험속에서, 여러분의 문제 속에서 교회는 어떤 일을 했나요? 저는 혹은 다른 목회자는 어떤 일을 했나요? 다른 성도들은 어떤 일을 했나요? 과거에 혹 그런 일이 없었다면, 혹 앞으로 일어날 문제속에서 교회나 저나 다른 성도들이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지는 않나요? 저는 교회나 저나 그리고 다른 우리 성도들이 서로의 위험과 고통속에서 광주리를 붙들어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다른 성도들이 붙들어 주는 광주리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주인공들은 우리 교회에서 제일 어린 아기에서부터 가장 나이드신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주님의 백성들은 여러분을 성벽에서 광주리에 담아 내려줄 수 있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주님은 성벽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을 통해 광주리에 담아 안전하게 땅에 내려놓아 주십니다. 지금은 귀찮은것 같아도, 지금은 힘드는 것 같아도, 지금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바로 이 교회가 여러분이 당면하게될 어떤 어려움 속에서 여러분 자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함께 성경을 볼 수도 있고 함께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놀러갈 수도 있고 함께 공부할 수도 있고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유익만 조금 포기하면, 지금 당장의 욕심만 조금 버리면, 지금 당장의 편안함만 줄이면 우리는 평생토록 함께 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에 가 있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그런 사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영원토록 함께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보았던 교회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교회는 새들백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의 시작은 1979년 12월 릭 워렌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의 나이로 사모와 4개월된 첫 아기와 함께 텍사스에서 남가주 새들백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릭 워렌 목사 부부와 아파트를 소개한 부동산 업자 가족과 함께 새들백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착한지 이 주일 후에는 7명이 모여 첫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목회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많았으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중요한 원리를 배우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개척교회를 시작한 다음 , 릭 워렌은 과연 어떤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기존 신자보다는 불신자들로 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계속 교회는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남가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위해 릭 워렌 목사는 12주 동안 자기 자신이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교회로 초청을 하기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먼저 듣기만 했습니다. 릭 워렌은 이러한 자신의 개인 방문에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이후 새들백 교회는 57회의 이사를 거듭하며 교회가 성장하였습니다. 고등학교 강당, 초등학교, 은행건물, 극장, 식당, 대형개인 주택, 사무실, 스타디움 등을 빌려서 사역을 하다가 마침내 대지를 준비하고 임시 2300석의 텐트 건물을 세웠습니다. 어마어마한 대지에 여러 개의 대형텐트같은 건물과 체육관 같은 건물을 지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들백 이라는 지역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을 섬겼습니다.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를 섬겼고 지금은 세계의 어려운 나라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PEACE라는 사역을 통해 아프리카의 어려운 나라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며 봉사자를 구하고 성도들을 주님의 나라와 사역에 초청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역이 얼마나 아름답게 확장될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들어서 사용하시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인원수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라면 규모에 상관없이 바로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인 하나님과 비록 완전하지만 않지만 방주리를 내리는 데에는 너무나 유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인내도 필요하고 봉사도 필요하고 때로는 물질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만든 교회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헛되지 않느냐구요? 아마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드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고스란히 이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드린 예배는 낱낱이 기억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는 우리가 드린 봉사는 우리가 드린 물질은 하나님 나라에서 고스란히 아니 더 큰 것으로 아름답게 쌓여져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만든 교회는 우리 자신에게는 뜨거운 태양빛을 피하는 그늘이 될 것입니다. 쉴만한 물가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는 평안한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받게될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는 영적인 병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알 수 없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교를 세울 수도 있고 병원을 세울 수도 있으며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고 고아원과 양로원과 기타 이 사회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용납하면서 서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의 광주리를 만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번갈아 돌아가면서 광주리를 타기도 하고 광주리를 태워 내리기도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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