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우리는 이제 여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과일이 있습니다. 바로 수박입니다. 바야흐로
수박의 계절이 된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에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을 먹으면 무더운 날씨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한 땀도 많이 나고 수분이 필요한 때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박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일입니다. 웬만해서는 맛있는 수박을 고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수박이 많이 나오기는 하는데 정말 맛있는 수박 찾기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왜
모든 수박은 항상 맛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수박은 수박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맛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맛있는 수박을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알 수 없는 그 속의 맛을 알기 위해서 두드려도 보고 꼭지도 보고 겉모양도 보지만 어느
것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맛있는 수박 찾기는 언제나 어려운 법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대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속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귀한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만 가지고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집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안다 하더라도 그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늘 기대와 다릅니다. 항상 기대하는 바는
있지만 언제나 그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겉으로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마치 그 속을 알 수 없는 수박과 같습니다.
하지만 수박도 그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듯이 그리스도인도 온전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무늬만 수박이 아니라 맛이 수박이어야
수박이듯이, 그리스도인도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 마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워야 정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한달 동안 특별히 묵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은 성령의 열매 (갈5:2)중에서 여섯 번째에 등장합니다. 원어인 헬라어로는 ‘ἀγαθωσύνη (agathōsynē)’이고 히브리어로는
‘טוֹב’(토브) 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goodness’이고 한자어의 뜻은 ‘양선,良善’(어질고 착함)이고
우리말로는 ‘선함’입니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로 보면 어느 정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악하게 생각하지 않고 선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양선이란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냉소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며 소망적인 생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로마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14절입니다.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선함이 가득 찬 자들이라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선함, 양선’이라는 덕목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그것은 바로 모든 지식이 차서 언제든지
서로 권하는 모습을 갖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필요한 지식을 알지 못하고 서로에게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 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권해야 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양선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녀가 자신은 왜 이렇게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부모님에게는
양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함이 가득하여 모든 지식이 차서 자녀를 권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자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왜 이렇게 일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아내에게는 양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함이 가득하여 모든 지식이 차서 남편을 권면해 주어야만 합니다. 아내가
집안일이 너무 고되고 왜 내가 이런 저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할때 남편은 선함이 가득하여 모든 지식이 차서 아내를 위로해 주어야만 합니다. 부모님이 나이 들고 힘들어서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에 자녀들은 선함이 가득하여 모든 지식이 차서
부모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는 왜 이렇게 부조리와 어리석음이 많이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고 말할 때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선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양선이 우리
가정과 우리 삶에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과 어려운 상황들로 인해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우리 자신에게 선함이 가득하여 모든
지식이 차서 스스로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낙관적이라고 말하고 긍정적이라고 말하며
소망적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양선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삶속에는 이러한 양선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맛있고 달콤한 수박을 먹는 듯한 그리스도인의
온전하고도 참된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들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남자대로 여자대로 각각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물에 빠지는 것처럼 혼란과 고민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이해할 수 없는 삶속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다시 혼란의 상태에서 이해의 상태로 올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선이 필요합니다. 서로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고 올려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올라올 때 다시 하나님의 좋으심과 신실하심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3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피차 권면하는 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되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이러한 양선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습니다. 또한 피차 권면하지 않음으로써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더욱 떨어져서 강퍅하게 되는 수준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어떤 어머니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홀로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항상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 괜찮다, 괜찮다 라고만 했습니다.
한번도 그러면 안된다, 그러지 말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에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처음 물건을 훔쳤을 때에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처음 사람을 때렸을 때에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자라면서 더욱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었고 이윽고 사람을 죽여서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사형되기
전에 어머니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어머니를 꼭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귓속말로
전할 게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귀를 가까이 댄 순간 아들은 어머니의 귀를 물어뜯었습니다. 깜짝놀라서 네가 왜 그러느냐는 어머니에게 그는 외쳤습니다. ‘어머니가
항상 괜찮다고 하셔서 내 인생은 망했어요!’
우리가 양선을 하지 않으면 인간의 악한 마음은 더욱 강퍅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양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양선을 행하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선을 함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양선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강퍅해지지 않도록 상황이나 문제를 선하게 생각하고 지식이
차서 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7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방인들이라고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라고 따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이방인은
버림받은 민족이고 가능성없는 족속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돌보셔서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셨습니다.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이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돌리시는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모든 양선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이 세상에 놀라우신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제 얼마 후면 월드컵이 시작됩니다. 이번 월드컵에도 국민적인 관심이 뜨겁습니다. 그래서 시청앞 광장에
모여 야외응원도 하고 전국 곳곳에서 열띤 응원열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2002년 이전에는 그런 거리응원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이라는
행사도 우리에게 생소했던 시기입니다. 경기 응원을 위해서는 주로 경기장에 가야 하거나 혹은 TV로 보면서 응원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TV를 안봐야 경기를 이기리라는 기이한 징크스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이라는 그 큰 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유치를 하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일에 열심이 있고 열정이 있으며 간절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그것은 국민적인 자신감이 되었고 국위를 선양하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그러한 원리가 이 그리스도의 ‘양선’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이방인을 생각하셨습니다. 무의미하게 생각했던 일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선하신 도우심
속에서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셔서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놀랍게 나타내었습니까? 이제 우리가 삶속에서 그렇게 예수님을 닮은 양선을 행할 때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바로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6월은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바로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60여년전
이땅에는 참혹한 625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저히
압도적이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패전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는가
패배하였는가 하는 여부는 매번의 전투 자체에서 그 결과를 알 수는 없습니다. 매번의 전투가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최선을 다해서 싸울 수 있고 비록 그 전투가 자신에게는 더이상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어떤 전투도 선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에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피난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당시 피난민들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나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가족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고 사람들을
지키려는 선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는
지킬 수 있는 국토와 국민과 나라와 가정과 우리 자신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노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애를 쓰지 않는다면
아무리 귀한 신앙심도 아무리 귀한 충성과 헌신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나타나는
말그대로 교리일 뿐이지 그것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역사가는 단지 역사를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양선의 모습을 통해 늘 선을
추구하고 선을 격려하며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역사하십니다. 13절 같이 읽어봅니다.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래서 소망이 넘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양선을 가능하게
하시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양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악으로 더 빠질 수 있는 모든 혼란과 고민과 괴로움 속에서
온전히 선을 향해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