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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긍휼] 49엡4;21-32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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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21-32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긍휼_1

 

 2014.5.18..주일오전.

 

*개요:    65긍휼, 2관점, 6서신서, 5은혜-6결심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5월에 스승의 날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스승은 가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스승은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가정이 온전한 가정되도록 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가정 내에서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럴 때 스승은 그 부분을 메워줍니다. 그리고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부분을 오히려 더 부모보다도 의미있게 도와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서 각 가정은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이 가정의 달과 의미가 있습니다.

애초에 스승의 날은 청소년 적십자인 RCY의 봉사활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충남 강경여고의 RCY단원들은 1958년부터 현직 선생님들과 은퇴 선생님, 그리고 병중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위문방문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3 RCY 충남협의회에서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921일을 은사의 날로 정한뒤에 사은행사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 다음해인 1964년에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고쳐부르고 날짜도 5 26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5년 세종대왕 탄신일인 5 15일을 기준하여 스승의 날로 정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큰 스승으로 세종대왕을 기준한 것입니다. 이후 1973년도에는 스승의 날이 국민교육헌장선포일로 통합되어서 사라졌다가 1982년도에 다시 부활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스승의 날의 전후사정을 생각해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승의 날의 가장 큰 스승을 누구로 생각할 것인가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높은 의미로 생각하자면 하나님에 이르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지만, 그 낮아지심은 우리의 선생님까지도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섬기면서도 우리의 스승이자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못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지키는 스승의 주일에 주로 우리는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리더, 교사 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 스승의 주일에 정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큰 스승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있는 모든 스승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모든 의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지도자와 직분자와 리더와 선생님의 의미는 가장 근원되신 예수님에게만 올바르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듣고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사실 예수님에게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믿으면 되고 따르면 되고 그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단순한 문제인데 예수님은 우리를 단순히 구원해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십니다. 단지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이제 다시 배움의 길의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살던 대로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과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 그래서 마침내 새 사람을 입게 되는 것은 사실 평생동안 배워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살아보지 않았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변화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은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삶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셨던 새로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가운데에서 새로운 삶의 설명이25절부터 쭉 나옵니다. 그것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며,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것이며,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며, 선한 말로 은혜를 끼치는 것이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삶을 살기가 쉽지 않고 그러한 삶을 요구받을 때 힘이 듭니다.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맨 마지막 절에 나오는 불쌍하게 여기는 것’, 긍휼입니다.  32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 이전의 것들은 자기 자신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32절에서 나오는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새 사람을 입은 모습이 꽃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전에 아무리 참된 것을 말하고 분을 품지 않고 선한 일을 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모든 악독과 노함을 버린다 하더라도 결국에 다른 사람들 속에서 완악하며 강퍅하고 냉정하다면 그는 새 사람을 온전히 입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불쌍히 여김 속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그 놀라우신 용서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붙잡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을 때리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어 다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하심을 믿지 않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서로를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대상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서로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 긍휼의 대상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의 갈등은 악인들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가족들끼리, 같은 성도들끼리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긍휼의 대상은 자신의 가족입니다. 자신의 부모요, 배우자요, 자녀입니다. 그리고 또한 같은 성도입니다. 자신보다 먼저 교회에 있던 성도요 자신보다 나중에 교회에 들어온 성도입니다. 그들을 인자하게 대하며 긍휼히 여기도록, 그리고 용서하도록 주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가르쳐 주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방법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함께 읽어봅니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왜 사도가 있겠습니까? 왜 선지자가 있겠습니까? 왜 복음 전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왜 목사가 있으며 교사가 있겠습니까? 그 모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군들이 있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긍휼히 여기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를 통해, 선지자를 통해, 복음전하는 자를 통해, 목사와 교사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형제교회라고 하는 한 기독교 분파는 교회내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형제, 자매로 호칭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장로직분은 내버려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형제교회는 목사직분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놔두고 오직 목사만 없앤 셈입니다. 목사가 있음으로 인해서 많은 부조리가 생긴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사실 목사와 교사 있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목사제도의 부조리때문에 사역자를 없애버리니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이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일군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는 학생때 다니는 교회에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 담임 목사님은 성도들이 말씀을 몰라서 자유주의나 비진리로 빠진다고 열정적으로 교리와 성경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화 하나 없이, 비유 한번 들지 않고 그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저는 그게 또 좋았습니다. 중고등시절이었는데 받아적기도 하고 시험을 치르기도 하면서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것을 잘 모르면 자유주의에 빠진다고 하니까 더 눈에 불을 켜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또한 여러가지 면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또한 주일학교선생님들은 열심히 주일공과공부를 공부해서 가르쳐주셨고 항상 사랑과 열정으로 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엄두도 못내는 대회에도 나가 보았고 상도 타 보았고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속도 많이 썩이고 마음고생도 많이 시키는 학생이었지만 언제나 교회선생님들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랑과 긍휼로 저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목사와 교사와 직분자들이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을 강압적으로 대우하며 마음을 아프게 하며 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여 이러한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군림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목사와 교사를 통해서 여러분이 말씀을 알게 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간다면 그 일에 수고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여러 도움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그로 인해서 긍휼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해야 하는 것은 그 긍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과연 누구를 긍휼히 여길 수 있을까요?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바로 여러분을 가르치는 자들과 긍휼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6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예수님의 귀한 가르침이었던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바로 말씀을 가르쳤던 자와 함께 나누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함께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은 좋은 것을 심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역시 좋은 것을 거두게 하십니다.

 

제가 대학시절 다니는 교회에서 부목사님이 개척을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세 명의 자녀까지 온 가족이 지방에서 개척을 시작하신다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가시는 날 짐을 함께 날랐고 교회를 수리하신다길래 이것저것 도왔습니다. 이모저모로 도우면서 정말 바닥에서부터 교회를 시작하시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이 바로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몇년후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갔고 신대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개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군가 도와주러 왔고 생각지도 않은 후원을 받았으며 어떻게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해 올 수 있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인자하게 대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용서해 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돌려받게 됩니다.

 

우리를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과 긍휼히 여기고 그 수고를 귀히 여기는 마음을 나누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새로운 사람의 모습임을 잊지 마십시오.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귀한 교훈을 받아 기억하고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을 아름다운 주님의 사랑으로 풍성하게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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