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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긍휼] 42눅7;11-16 부모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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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11-16 부모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_1

 

 2014.5.11..주일오전.

 

*개요:    65긍휼, 2관점, 5복음서,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이번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이번 주일을 어버이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봅니다. 기본적으로 어버이날에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어버이날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자녀로서 어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써 어버이를 보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녀로서 어버이를 바라보며 공경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버이를 내려다 보시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긍휼히 여기심은 자녀를 위해서 애쓰고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인내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애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부모가 되기 전 그들은 한 사람의 남편이며, 아내였습니다. 또한 부부가 되기 전 그들은 한 사람의 남자이며,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된 다음에 그들은 오직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다른 삶은 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에 밀립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남편으로서의 삶이 있고, 남자로서의 삶이 있지만 그 중의 최우선은 아버지로서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아내로서의 삶이 있고, 여자로서의 삶이 있지만 그 중의 최우선은 바로 어머니로서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 모든 인생의 우선순위를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저는 교회 사무실에 있다가 구슬피 들리는 고양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작게 들리는 고양이 새끼소리도 들었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엄마가 새끼들을 찾는 소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엄마고양이는 새끼고양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새끼고양이는 엄마고양이를 찾아서 서로 구슬피 우는 소리였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제가 다가가니까 엄마 고양이는 휙하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처마 밑 어딘가에 새끼 고양이 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도대체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찾다가 이상하다 싶어서 교회 본당안으로 들어와서 환풍용 창문을 열어보니 바로 거기에 새끼 고양이 2마리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 위의 환풍구를 스치로폼으로 막아놨는데 그 사이로 빠져서 떨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두 마리를 자루에 담아서 어미에게 가져다 주려고 나와보니 어미고양이는 안가고 거기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루안에 새끼고양이들이 소리를 내는 것을 듣더니 저에게 막 샤악샤악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데리고 가기 좋게 고양이들을 내려 놓았습니다. 그러자 어미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를 하나씩 입으로 물고는 떠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 쟤가 어미긴 어미구나. 어미는 다르구나

 

이땅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이 심지어는 개와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자식을 그토록 끔찍이 생각하고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식을 키우고 먹이고 기르기 위해서 온몸을 바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요? 그 유사성 속에서 하나님은 어버이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그 괴로움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지나가는 과부의 눈물과 곡성을 외면치 않고 들으셨습니다.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와 함께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전파를 위해서 애를 쓰고 계셨습니다. 주님께는 어쩌면 애초에 이 나인이라는 성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 나라를 확장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을셨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한 장면을 만나시면서 주님은 하시던 모든 일을 다 중단하셨습니다. 바로 한 과부가 그 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은 매우 비통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과부였고 아들은 그 어머니의 독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마저도 이제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도 그 어머니의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나왔습니다. 이 성의 이름인 나인의 의미는 아름답다, 귀엽다, 즐겁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아름답고 귀엽고 즐거운 성에 과부의 아들의 죽음은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기쁘고 즐거워할 때에 오직 이 어머니는, 그리고 그 어머니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결코 즐거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지나가는 길을 멈추시고 하던 일을 다 중단하시고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바라보시면서 그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아픔과 그 고통과 그 눈물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주님은 그 여인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그 울음과 그 통곡과 그 눈물이 거두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더이상 울지 말고, 더이상 아파하지 말고,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과 그 눈물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인성의 어머니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들처럼 예수님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인성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인성은 성경에서 이때 딱 한번 나올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예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예수님이 아실까요? 그 모습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 그 나인성 과부의 모습은 장차 미래의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도 앞으로 얼마 후면 그렇게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동일하게 남편이었던 요셉이 일찍 죽어서 과부였고, 그리고 젊어서 죽게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과부의 마음을 아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경험해보고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비슷한 경험 속에서 그 마음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긍휼히 여김이 생겨납니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결국은 그 연결성에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그 괴로움에, 그 슬픔에, 그 고통에, 그 눈물에 연결되고 연결되어질 때에 긍휼이란 마음이 생겨납니다. 연결되어지지 않으면 그 마음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나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나와 다른 지역 사람입니다. 나와는 다른 성별의 사람입니다. 나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단절시키게 되면 결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결시키려고 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연결될 때에 비로소 그는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되어집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단절되고 단절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외면하고 외면합니다. 그가 부모이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려고 하는 개와 고양이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는 부모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만 위하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일4: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부모로서 자녀를 돌보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그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긍휼로 인간들을 바라보십니다. 그 긍휼히 여기심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고 그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장례를 치르기 위한 길이 바빴겠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행렬을 중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관 위에 손을 대셨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가 의아해했습니다. 왜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예수님은 청년에게 내가 네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라는 말씀이 너무나 권능과 영광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네게라는 말씀은 온전한 순종과 통치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와 그 네게는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였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인해 일어나라라고 하셨을 때에 그 아들은 바로 일어났습니다. 그 아들은 죽어있는 시체요 하나의 객체일 뿐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를 일어나게 하시는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신이라도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우신 예수님의 능력이 죽은 이 아들을 살려서 일어나 앉혔습니다. 그뒤에 그는 말도 했습니다. 언제 죽었느냐는 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아들을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아들을 위해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 아들의 살아남은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하셨던 말씀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냥 하시는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도 즉시 울지 않고 웃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에 울던 어머니도 다시 살아난 아들을 보면서 웃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부모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식을 위해 피눈물 흘리시는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녀를 위해서 고통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녀를 위해서 때로는 목숨을 버리고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부모님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모습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자신도 그 아들을 잃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식을 잃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아십니다. 하나님 자신도 그 자식을 잃게 되는 것을 뻔히 알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을 막을 수 없고 그것을 견뎌야만 하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것을 경험해보셔서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죄로 인해서 죽는데 내어주셔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죄의 결과로 인해서 아들 예수님이 죽는 것을 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모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또한 그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주님은 그 부모와 연결되십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고통과 괴로움을 알기 때문에 그 깊은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립니다. 모든 자녀를 다시 살리는 힘은 바로 죽은 자녀를 위해서 통곡하는 그 부모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죽은 것과 같이 된 자들이 눈을 뜨게 합니다. 드러 누워서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자녀들이 다시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다시 앉게 하고 말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더이상 울게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합니다. 그런 일들이 바로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셨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오늘날 죽은 자녀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지는 않으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 시신으로 돌아온 자녀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지는 않으십니다. 다시 살려놓으신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하나님은 그 자녀를 다시 살리시지는 않으십니다. 비록 그 일로 인해서 더 상처를 받고 더 분개심을 갖고 더 증오심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하나님은 그 자녀를 지금 당장 다시 살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은 살려주셨지만 모든 부모의 자녀를 살려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기준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기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7:1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주님은 그가 바로 나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가 여전히 살아있기를 바랬지만 그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기준에서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편히 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바라봅니다. 언젠가 그 안식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나중에 하나님 안에서 모두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소망이 우리를 더욱 붙듭니다. 우리를 더욱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부활하게 하심으로 강하게 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로서 우리는 모든 부모님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다시 그분을 붙듭니다. 자녀의 아픔과 고통과 죽음으로 인해 시험들거나 실족하지 않고 오직 평안함 속에서 그 자녀를 맡아주실 그분을 믿고 바라봅니다. 그럴 때 그 긍휼함을 깨닫게 되고 그 긍휼함 속에서 주님을 붙듭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붙듭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하나님의 평안에 들어가도록 그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또한 자녀로서 우리는 그 긍휼함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 우리의 부모님을 울지 않고 웃게 해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님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게된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온전히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을 통해 부모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여서 우리의 부모님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긍휼하심의 이 놀라운 은혜가 이 5월에 우리 가운데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다시 울지 않고 웃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시는 여러분의 가정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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