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대개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은 피가 튀고 살점이 뜯겨나가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매우 끔찍한 고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감당하셔야
했던 고통은 단지 십자가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괴로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에 대제사장의 종들에 의해서 잡히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잡혀서 끌려가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고통과 괴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시고 피가 땀이 되도록 기도하셨지만 그
이후에 찾아온 것은 대제사장의 종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기도는 들으심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 그 모든 되어진 일은 이미 감당하기로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가룟유다와 대제사장의 종들을 보면서
담담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잡히시면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것이 바로 고난의 시작이었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로 인해서 아버지의
원이 이루어지며 놀라운 구원사역이 성취될 것을 또한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다 인내하시면서 감당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잡히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또한 기도로 준비하라고 말해 주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들으면서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기도로 준비하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정작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그 십자가의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인지 주님은 아셨기 때문에 준비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맞닥뜨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있었던 제자인 가룟유다가 배신을 했고 그가 대제사장의 종들을 아무도 모르는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은 더할나위없는 분노의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가뜩이나 예수님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무방비로 예수님을 끌려가시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휘둘렀습니다.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그는 주님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대제사장의 종들 중의 한 사람을 쳐서 그 귀를 짤랐습니다. 아마 머리를 쳤는데 그것이 스치면서 귀를 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본격적으로 대응을 하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막으셨습니다.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제자들을 제지시키시고 자신을 잡으러 왔다가 귀가 떨어진 그
사람의 상처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순순히 저들에게 잡히시려고 하는데 그러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세게 저항하며 분노하는 제자들을 막으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이것까지 참고 계셨던 것이고, 그러한 인내를 제자들에게도 말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함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신앙에 속한 일이
아닌 다른 일들에 사용하고 소진하고 있는지! 그들의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 때문에 외면적인 쾌락을 위해, 명예와 명성을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그들의 소망은 강렬해지고 욕망은 타오르며 그들의 사랑은 불이 붙고 열정은 강렬해진다. 이런 일들에서 그들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쉽게 감동되며,
깊은 인상을 받고 큰 관심이 생기며 감정이 매우 강하게 자극되고 깊이 빠져들게 된다. 세속적인 실패로 인한 슬픔 때문에 많이 우울해지며,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으로 인한 기쁨 때문에 크게 흥분된다. 하지만 영원한 세계에 속한 일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지 못하고, 무감각한지!
얼마나 그들의 감정은 무디어져 있는지! 이런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그들의 심령은 얼마나 굳어져 있고, 강팍해져 있는지! 그들이 사랑은 얼마나 식어
있으며, 그들의 감사는 얼마나 부족한지!
어떻게 그들은 인간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당신이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무한히 높고 깊고 길고 넓은 사랑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고통과 피 섞인 땀과 크고도 쓰라린 울부짖음과 피가 철철 흐르는
심장으로 드러난, 죄없으시고 거룩하시며 온유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비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마땅히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할 원수들을 구원하여 영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앉아서 듣고도 그 마음이 냉랭하고 굳어지며 무감각하며 무관심할 수 있는지! 이일이 아니라면 우리의 감정을 적절히 사용할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무엇이 감정적인 작용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에 우리의 감정을 생생하고도 활력있게 쏟아놓을 수 있겠는가? 이일보다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 놀랍고 위대한 어떤 다른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는 이 일만큼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일이 있겠는가? 지혜로우신 창조주께서 사람에에 유익하도록 또 적절한 경우에 사용하도록 사람의 본성에 감정이라는 원리를 심으셨다면, 이런 경우에
우리가 조용히 앉아 있기를 원하시겠는가? 이 복음이 진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고난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동참합니다. 금식을 하기도 하고 TV를 보지 않기도 하고 새벽기도에 나오기도 하고 여러가지 힘든 일과 어려운 일을 자처하면서 고난주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을 위한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란 그 모든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회적으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검을 밖으로 빼지 말고 그 검을 도로
집에 꽂고 심지어는 악인의 행악까지도 참으며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갑니다. 고난주일에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그분과 함께 하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의 길을 얼마나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때의 제자들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총동원하여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있는 힘껏 대응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대응하지 말고 검을
들어 또 다른 누군가의 귀를 내려치지 말고 예수님처럼 그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검을 휘두릅니다. 교회에서 검을 휘두릅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검을
휘두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악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히 응징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악에 져서는 안됩니다. 악에게 붙잡혀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승리하며 항상 이기며 항상 악을 물리치며 살아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에 대한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악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로잡히는 상황에서는 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순순히 저들에게 끌려가시겠다고 하실 때에 우리의 선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선과 멀리해야 하는 악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은 선이 어디있습니까? 그 구체적이고 분명한 선을 버려두고 어디에서 선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선보다 다른
선을 추구하여서 자기를 보호하며 선생님을 보호하고 악에게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할 때에 그것은 악이 되어버립니다. 선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도에서 칼을 휘두를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려고
했건만 눈앞에 있는 선을 버리고 자기만의 선을 추구하려고 할 때에 결국에는 자신이 그렇게 거부하였던 악을 스스로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복음서에서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예수님은 검을 도로 집에 꽂을 뿐만 아니라 검을 갖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선을 추구하려고 해야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선과도 일치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를 알게 될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일을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선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하신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실천을
위해서 분명한 마음을 결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에 죄에 대해서 죽으셨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힘이 없어서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끌려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사시기 위한 의지적인 헌신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죄악으로 갚으신 것이 아니었고 오직 의에 대해서
더할 나위없는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예수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내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으려고 하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있으려는 마음이 바로 인내인 것입니다. 그런 인내가
있을 때에 비로소 놀라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창세기 6장에는 노아의 방주사건이 나옵니다. 요즘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나왔다고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하나님이 지으라고 하는 대로 방주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가 노아에게 나타났을 때 노아는 그 의를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고단한 과정은 100여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지은 방주는 결국
100년 뒤 나타난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은 그 방주 속에는 노아와 함께
방주를 만든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였습니다. 그들도 노아와 함께 노아가 받은 부르심을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을
때 노아를 도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인내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도 함께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1장 12절에는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들어가고자 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를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한 바울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하지만 그들은 그냥 더이상 바울을 권하지 않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바울이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일에 동참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고자 하셨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행21: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쌔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결국,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서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후에 로마의 복음화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동참했던 자들이 또한 교회의 일군이 되어서 놀라운 복음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들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가능하게 하셨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그분의 희생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또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구원의 일을 우리가 못하게 막는다면 그것은 철저히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결정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하는 것도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모든 일을 참으면서 주님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의 마지막은 54절입니다.
“눅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주님은 끌려가시지만 그것은 주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따라갑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용기가 있는 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따라 들어가고 있습니다. 비록 그곳에서 베드로는 겁에 질려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그 자신의 연약함까지도 참으면서 그는 주님을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따라갔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다 보면 이런 저런 참을
일이 많습니다. 괴롭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생겨나는 고난은 결코 한주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주간만 보지
마시고 주님의 길을 바라보십시오. 고난 이후에 오는 영광은 고난 그 자체에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힘들지만 주님을 따라갈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면서 더욱 주님 의지합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 구원을 주시려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험해도 주님 붙들고 그 고난과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시는 우리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