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3월에 평안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발견했던 말씀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
것이 한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펴보았던 평안의 구체적인 모습은 풍랑이 밀어닥칠 때 배안에서의 평안과 나사로 죽은 지 사흘 만에 가셔서
나사로의 가족들과 나사로 자신에게 주셨던 평안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알게 하셨던 평안이었습니다. 이 모든 평안 속에서 공통적으로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안, 화평, 평강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공통점을 모른다면 아직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알아야 하는 공통점이란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달랐습니다. 세상의 평안은 내가 기쁘고 즐거워서 평안한 것이었지만 주님이 주신 평안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함으로 인해 평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평안이 그냥 주님과 함께 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함께 함이 보여주는 더 큰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마치 자전거가 정지한 상태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균형을 잡는 것처럼 평안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원래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셨던 평안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니까 그 평안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은 깨달았다 하더라도 깨닫지 않았던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전거를 어떻게 타는지 모르다가 비로소 타게 되었다고 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는 뛸듯이 기쁠 것입니다.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닐 생각을 하니
기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계획은 없고 그냥 남들이 다 타니까 이제서야 나도 타는 것뿐이라면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전거를 탈
계획이 없다면 좋은 자전거를 사더라도 그냥 창고에 쳐박아 두기만 할 것입니다.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을 가지고 있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있어도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함께 하심을 통해서
더 큰 의미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평안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평안의 더 큰 의미란 우리가 누리는
평안속에서 이 세상을 이겨내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안에 대한 이야기를 요한복음 14장에서 시작하셨고 이제 16장에서 그 이야기를
마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하셨던 말씀은 33절입니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주님이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하신다는 것은 이전에도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이기신 이 세상에서 그 승리를 함께
누리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릴 수 없도록 환난을 당하기는 하지만 주님이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담대함으로 다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말의 의미는 우리가 평안을 누릴 때 그로
인해서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루신 놀라우신 구원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루신 세상을 이기심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실 때의 이긴다는
것은 헬라어로는 ‘νικάω (nikao)’ 영어로는 ‘overcome’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극복하다, 이기다, 압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을 때의 그 승리는 바로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압도하셨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승리하심을 기억하고 우리가 평안을 누릴 때 우리도 동일하게 세상을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의
승리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요한1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저희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바로 세상의 사람들과 세속적인 영향이었고 그 이김을 통해서 그들처럼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승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권세와 능력보다도 더 크셨기 때문에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승리를 얻게 하는 마음이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 평안을 얻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님이 이루셨던 그
승리를 함께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무시무시한 명령앞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왕의 신상앞에서 절을 할 것인가, 아니면 풀무불에 들어갈 것인가였습니다. 그 선택속에서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극히 평안함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생명의 위협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겨내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그들이 이미
이루었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명의 진실한 하나님의 성도들이 풀무불에 집어넣어졌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명을 넣었는데 한 명이 더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들이 의지하던 하나님께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단3:24 때에 느부갓네살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25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그것은 실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평안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 평안 속에는 세상을 이김이 있고 그 이김 속에는 주님과 함께 함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 주님과 함께 함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 그 원리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오늘날의 삶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게 됩니다. 주님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는 상황속에서도 보이기에는 사람들이 떠나서 흩어져서 혼자
남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주님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더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 항상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근원적인 불안함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떨어질 때 분리불안이
생깁니다. 가족으로부터 떨어질 때 애정결핍이 생깁니다. 친구들로부터 떨어질 때 외로움과 우울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떨어질 때 죄책감과
수치심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좌절과 절망 속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붙들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항상
함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함께 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고 극복하게 하며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였으나 세상을 극복하며 세상을 이기며 그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의 정도의 차이가 있고 평안의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모두 동일하게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에 다 동원됩니다. 그것은 올라가는 것이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면서 또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이 평안을 누리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나아가셨고 우리도 그렇게 나아갑니다. 주님은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것을 위해서 나아가신 것이고, 우리는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나아갑니다.
저도 그러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회자로의 그 부르심 속에서
저는 끊임없이 평안을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개척으로의 부르심 속에서 수많은 선택에 놓여야만 했습니다. 여러가지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으로
인해서 고민해야 했고 제 자신이 초래한 많은 위기 상황들에 대해서도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평안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뭔가 쫓기듯이 혹은 두려운 마음으로는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과가 안좋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낙심하고, 때로는 걱정하고, 때로는 자책하고, 때로는 모멸감을 느끼면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까, 이 사람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 그속에서 제가 간절히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 이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도와주세요. 하나님, 제 마음에 함께 해주세요.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기도 했고, 예수님의 눈물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령님의 은사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이야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 그 한분을 간절히
사모했을때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 혹은 성자 하나님으로, 혹은 성령 하나님으로 제가 다가오셔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목에까지 차올랐던 갈등과 고통은 어느새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마음에는 더할 나위없는 평안함으로 새롭게 채워졌습니다.
그 느낌을 아니까, 그 기분을 아니까 다음 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그 평안함을 사모하고 또 사모하다 보니까 시간이 어느덧 이렇게 흘러 버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주님 앞에 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 누리는 그 평안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셔야 했고 그 길을 앞에 두고 계셨지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 사이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지만 주님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속해 있는 자였음을 깨닫고 이제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려고 할 때에 세상을 극복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평안하게 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평안하기 위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기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갑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서 자전거와 관련해서 자신이 겪었던 예화를 들려주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대학생때 고등학생 과외를 하셨는데 그 학생의 누나가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자전거 타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목사님은 자전거를 탈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여학생 앞에서 자전거 못탄다고 말하기가 싫어서 그러자고 했답니다. 자전거
타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찌 어찌 하면 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되어서 자전거를 타러 갔는데,
끊임없이 넘어지고 끊임없이 들이박고 끊임없이 다쳐서 결국에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과외도 창피해서 그만두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정말로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평안이 필요한 상황을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받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회사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순간 순간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세상에 지지 말고 이겨서 하나님을 붙드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평안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평안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자전거를 타는 자들이 됩니다. 자전거를 끌고만 가는 자들이 아니라 그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 이 평안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면 예수님이, 예수님을 붙들면 성령님이, 성령님을 붙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을 계속 경험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순간 순간의 삶 속에서 여러분 각자가 뒤로 물러나서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자들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