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나신 날이었던 성탄절이 어제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우리는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성탄절의 기쁨과 감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가 또 다시 모여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어서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힘들고 그렇습니다. 주말의 패턴이라는 것이 있는데 휴일로 성탄절을 보내게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토요일이 성탄절이니 계속 이어지는 주일예배는 어떤 면에서는 힘든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어떨까 해서 달력을 보니까, 내년에는 성탄절이 주일이더군요. 한번에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지만 성탄절이 휴일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이제 성탄절을 보낸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임마누엘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방금 어제 지낸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다소 맥이 빠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떤 말씀이라고 해도 바로 어제 성탄절이라는 절기 이후에는 그 의미가 아무래도 약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니면 반대로 어제의 기쁨과 감격을 계속 이어지고 그 의미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경우를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여러분이 방금 일출장면을 보았다고 해봅시다. 해가 뜨는 것 얼마나 장관입니까? 어두움 속에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때 해가 그 모습을 쑥 드러내는 것, 그것은 얼마나 장관일까요? 그런데 일출을 보는 사람의 경우가 모두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매번 일출을 보려고 할 때마다 구름이 가득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수평선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보면 어느새 하늘 저 위쪽에 벌건 태양이 떠 버리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일출과 그 이후의 시간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구름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만약 제대로 일출장면을 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감동적이고 역동적이었던 일출은 그 다음에도 여전히 놀라울 것 같습니다. 구름도 하나 없고 날씨도 맑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찬란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때로는 구름에 가려서 일출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다음에도 비치는 태양의 햇살의 눈부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삶의 여러가지 형편에 찌들어서 예수님의 나심을 잘 깨닫지 못하고 그 감격을 잘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태양의 일출은 별볼일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성탄의 기쁨을 잘 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이 서울 어딘가에는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한 것이구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성탄이라는 일출을 맞이하였는데 우리는 그 이후에 햇빛 속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두움 속에 살고 있습니까? 분명 성탄은 어두움 속에서 맞이한 하나님의 아들의 나심이었고 그것이 일몰이 아니라 일출이 틀림없었는데 그 다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빛 가운데 있는 삶입니까, 아니면 어두움 속에 있는 삶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 태양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을 직접 몸으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구름이 자욱해서 안개가 가득해서 흐리고 굳은 날이라서 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낮에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태양이 떠올랐음을 알 것입니다. 구름이 태양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아서 그렇지 구름 너머에서는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름 아래에서 태양을 부정하며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태양은 뜨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주변에 다 밝아졌어도 계속해서 오늘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떠오르지 않는 태양 때문이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이 바로 이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5절말씀입니다.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빛은 떠올랐다, 그리고 어두움에 비취어 졌다, 그러나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오늘날 예수님의 나심과 그리고 이 세상에 거하심은 태양이 훤히 떠오른 것처럼 너무나 분명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태양을 부정하며 태양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더욱 더 어두움을 추구하며 더 깊은 죄의 어두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빛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합니까? 그 빛되심을 실감한다면 우리는 일출을 경험하고 그 이후에 세상에 내리쬐이는 빛을 누리고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 따뜻하고 강렬한 햇살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명확히 보게 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되며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곳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 우리의 관심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있었습니다. 힘있는 장사처럼 불끈하고 바다위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은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태양이 이 온세상을 비추어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밤 왜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그 길이 얼마나 위험했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떠오른 태양과 그 태양의 햇살을 통해 비추어진 세상을 바라보며 깨닫게 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걸어온 길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면서 항상 두개의 발자국이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는 자신의 것과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에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왜 제가 저렇게 힘들고 괴로웠을 때에 함께 하시지 않았나요? 어디를 가셨었나요?” 주님이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저 발자국은 나의 것이란다. 내가 너를 업고 저 시기를 지나갔단다.” 우리는 주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도우셨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얼마나 보호받는 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빛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해석하고 설명해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이 바로 그러한 빛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온 것도 그냥 온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동네에서 온 것이 아니라 관계와 이끌림에 의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전부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의 빛을 받을 때만이 진정한 이유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성도님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오게 되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놓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혹 말할 때도 있지만 믿지를 않을 때도 많이 있었구요. 오직 교회에 대한 부르심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왜 이 교회에 보냄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더 나아가서 왜 나의 삶은 그러하였는가도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빛은 너무나 강렬하고 구체적이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모든 것을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그 빛의 정체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 그 자체도 놀랍고 감사하지만 그 빛에는 더욱 더 놀랍고 감사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4절입니다.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는 빛은 바로 생명이었습니다. 빛이 비추어지는 것은 사실은 생명이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빛의 본질을 ‘파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결과 같이 빛도 하나의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써 그것이 사물에 비치고 그런다음에 반사 됨으로써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색깔이나 모양이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또 다른 빛의 본질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입자’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파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물질이 전달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질의 전달이 에너지를 만들고 광합성을 일으키며 이 세상의 모든 빛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에게 힘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을 가져다는 주는 것이 바로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을 경험할 때 주님을 의지할 때 단지 삶에 대해서 해석을 해주시고 설명을 해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과 함께 하고 있으면 그렇게 생명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할 때 주님을 생각할 때 주님을 의지할 때 생명을 얻습니다. 식물이 태양으로 인해 광합성을 하게 되고 그 에너지를 얻어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의지함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주님이 그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우리 교회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일로 심하게 좌절을 해서 교회개척을 그만 두어야 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살 힘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그냥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마음이 나아지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화만 났지 마음이 진정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로 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봐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교회문을 닫기 전에 최소한 하나님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할려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울고 나니까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 하소연과 내 처지와 내 불행함을 다 아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니까 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구나를 아니까 생명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얻게 되니까 다시 교회를 계속할 소망이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까 했던 말을 다 취소하고 계속해서 교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게 되었으니까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 다 된 것 같은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 같은 경험말입니다. 마치 건전지가 다된 에너자이저가 건전지를 새로 끼고 다시 강해지는 것같이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할 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지 말입니다. 우리 주변의 생명은 다 한계가 있습니다. 지난번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우리를 탈출한 말레이곰의 수명은 30살이랍니다. 인간의 수명도 한계가 있어서 길어야 100년입니다. 병이나 기타 다른 사고로 더 일찍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석연료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석유의 경유는 2050년 쯤이면 지구의 석유가 고갈이 된다고 합니다. 영원토록 석유를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어떨까요? 그분도 어느 때가 되면 고갈되지 않으실까요? 그분도 어느 순간에는 소멸되지 않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봅시다. 1절부터 3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예수님은 존재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이 사실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계셨고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분이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이 세 분은 태초부터 계셨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지은바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고 소멸하더라도 멸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된 시점이 있지만 창조자이신 예수님은 그런 시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을 주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영원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하신 빛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속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빛을 받아 그속의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햇빛을 받아 살아가는 식물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함께 하다보면 누구를 나타내게 될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함께 밥을 먹을 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압니다. 누군가 우리는 담배피지 않고 술을 먹지 않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압니다. 누군가 우리가 예수님 믿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랑 교제를 나누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압니다. 누군가 우리가 정직하게 하려고 하고 불의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압니다. 그러면 그 누군가는 물어볼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사느냐구요. 그럴 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사는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모습과 내용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것과 은혜가 풍성하신 것과 긍휼에 넘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 자신이 결코 빛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꼭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우리 가족은 우리 친척은 우리 이웃은 나를 통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빛되신 그분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해가 지나갑니다. 앞으로 5일후면 2010년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2011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만 예수님을 믿고 내년에는 예수님을 안믿을 건가요? 이 세상에서만 믿고 저세상에서는 안믿을 건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하신 예수님을 계속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떠오른 태양이 종일토록 이 세상을 비취는 것처럼 우리가 깨닫게 된 예수님의 은혜를 날마다 이 세상에 비추면서 나타내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2010년에도 그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다가오는 2011년에도 그 은혜를 더욱 새로운 삶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받아서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2시점> [0복음]~[8사명] 1.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생명이며 빛이었습니다. 2. 사람들은 그 빛의 오심을 알지 못하였고 우리도 그 빛이 오셨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3. 세례요한은 그 빛이 오셨음을 증거하고 믿게 하는 사람이었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4. 우리는 빛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