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7: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창]7:14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창]7:15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창]7: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오늘은 5월 31일입니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이번 5월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5월은 가정의 달로 많은 가정적인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5월 1일 노동절을 시작으로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석가탄신일이 낀 연휴까지 있어서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단지 휴식과 연휴의
의미보다도 가족끼리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더욱 감사한 날들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오늘
우리는 가족초청의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가족의 화목함은 사회와 나라의 근본입니다. 가족이 서로 친근하다면 사회가 친근해질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늘
모든 사람을 자신의 가족처럼 대할 때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가족처럼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족사랑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가족사랑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통해서 가족을 사랑하게 되고 평소부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가족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가족사랑에 대한 말씀이 우리가 매주일 마다 모여서
읽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어보시는 분들도 있지만 교회에서 보는 성경말씀은
그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보면서 그 의미를 나눕니다. 오늘도 우리가 세 가지 가족사랑에 대한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성경말씀에
대한 이해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가족을 사랑하게 되고 가족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가족을 사랑할 수 있게 하게 되는 마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가족사랑의 모습은 노아가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13절입니다.
“[창]7: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노아는 세상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온가족과
함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방주가 완성되고 하나님의 신호가 떨어졌을 때 주저하지 않고
온가족을 데리고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온세상에 홍수가 임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방주를 만들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당연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중요한 모습은 노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멸망할 때 어쩌면 노아는
자기 혼자서 방주를 만들고 방주를 타고 그래서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가족을 다 데리고 함께 방주를 만들고 함께 방주에 올라탔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아의 행동은
바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를
다 데리고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을
다 데리고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이 진정한 가족사랑을 나타내고 있으며 성경에서 보여주는 어떻게
가족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정말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들을 데리고 방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나혼자 방주로 들어가면서 끝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 구원을 받는 의인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의인이었고 하나님께서도 의인인 그를 구원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가족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지만 625전쟁으로 인해서 어렵고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을 살리려는 부모님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흥남철수 사건은 가족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 위대한 장면이었습니다. 피난을 갈 때
한명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던 간절함은 살기 어려웠던 그 시기를 견뎌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복음화율이 높고 인구의4분의 1일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된 것도 가족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을 시키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만 구원을 받고 자기만 방주를 타려고 했다면
어떻게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진실한 가족사랑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가족구원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가족이 가족구원을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가족사랑의 모습은 야곱이 자신이
받았던 축복을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장면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창세기 48장 2절부터 나타납니다.
“[창]48: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창]48: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창]48: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하나님을 아들 요셉에게 말하였습니다. 물론 요셉도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야곱의 믿음은 그가 아주 늙고 이제 일어날 기운이 없게 될 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야곱이 자기 인생을 다 살고 어려운 고비를 다 끝낸다음에 사라지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손과 그 후손의 후손에게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아버지의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고 아들의 하나님은 아들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속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가게 하는 힘과 능력이 되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믿음은 그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대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2대로, 3대로 이어지는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오게 해서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창]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창]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 아이들은 요셉이 애굽에서 애굽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식 교육을 받고 애굽의 말을 하며 애굽의 사람으로 살아가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바로 그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하여지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요셉을 사랑하였고 그 요셉의 자녀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야곱보다 요셉이 더 부자요, 요셉의
아들들이 더 부자였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를 떠나서 그들은 야곱의 후손들이었고 하나님의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애굽에서 애굽사람들 틈에 묻혀서 살다가 사라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땅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야곱이
가족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을 위해서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큰아들은머리는 좋으나 공부하기 싫어하였고 둘째 아들은 힘은 좋으나 게을러서 일하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날 때쯤 이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유언을 남겼습니다. 큰
아들에게는 ‘네 몫의 유산은 서재에 감추어 두었으니 그곳에서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밭에다 숨겨놓았으니 밭을 잘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이 두 아들은
각자 자신의 유산을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서재에서 열심히 책을 찾아보던 큰 아들은 책을 보다가
재미가 있어서 학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둘째 아들은 밭을 열심히 파헤치다가 이왕 파헤친 밭에 씨나 뿌려서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농사를 지었더니 너무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실한 농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해서 정말 좋은 것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언제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자녀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성경속에서 나타나는 가족사랑의 모습은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나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에는 부자와 나사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눅]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눅]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인생에서는 이렇게 아주 높은 위치로 살았고 아주 낮은 위치로
살았는데 죽은 다음에는 완전히 상황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죽은 뒤에 음부의 고통으로 빠지게 되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과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눅]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것은 원래 비유이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은 구원을 받은
자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부자는 음부의 고통속에서 나사로를
안고 위로하는 아브라함에게 왜 자신은 여기에 있고 나사로는 거기에 있는지를 물었습니다.그러자 아브라함은
대답하였습니다.
“[눅]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셔서 자신에게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에게 가서 이 원리를 알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눅]16: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눅]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비유는 여기서 끝이 나는데 부자가 자기 형제, 자기 가족을 위해서 간절하게 부탁하는 장면은 가족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합니다. 부자는 정말 가족을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구원의 원리를 미처 알지
못해서 음부의 고통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다른 형제들은 다른 가족들은 이 음부의 고통에 들어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안타까운 가족사랑의
모습입니다. 내세의 원리를 알지 못해서 내가 이 음부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다른 가족들도 다 이 음부에
들어오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비록 쇠퇴해도 다른 가족들은 올바르고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족사랑의 마음을 알고 그 정성을 알고 그 간절함을
알기에 오늘도 모세와 선지자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구원을 설명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오늘도 어떤 가정이 먼저 떠난 가족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전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게 되도록 그 깨달음을 돕습니다. 그러한 모세와 선지자들이 바로 오늘에도 존재합니다. 교회와 교회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도움을 통해서 진정한
가족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으로 공자 다음가는 학자라
불리웠던 유교학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시절에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랐습니다. 처음에 맹자의집은 묘지 근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사람의 흉내를 내며
놀았습니다. 이것을 본 어머니는 어린이들의 교육상 좋지못하겠다하여 다음에 시장 근처로 살림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린 맹자가 장사하는 사람의 흉내만 내며 다니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집을 다시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당시 중하게 여겼던 예절을 가리키던 유교 학교
옆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맹자는 앞에서 그랬듯이 학교에서 가리키는 예절을 따라하면서 지냈습니다.그러면서 학문을 배워서 나중에는 훌륭한
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는 없었어도 또한 좋은 교육을 직접
베풀수는 없었어도 맹자의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함으로 자녀를 위해서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길로 나아가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이 시대에는 교회와 신앙생활이 그러한 좋은 길을 가족과 자녀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에 가장 좋은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좋은 삶과 다음 세상에까지 미치는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에 가족이 편안하며 화목하며 화기애애한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늘 바라고 소망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화목함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애쓰고 노력해야만 평온한 가족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가족의 화목함은 현세에서의 유한한
삶으로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속에서 누리는 진정한 가족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만 누리고 저세상에서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다 찾을 수 있고 다 만나볼 수 있고 다
기쁨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한 가정의 모습을 오늘도 소망하며 함께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각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고 영생을 누리는 아름다운 가정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그러한 조부모와 부모와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