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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사회] 7삿 19; 20-26 세상의 악행과 하나님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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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 20-26 세상의 악행과 하나님의 심판_1

  

 

  

2020. 1. 19. . 주일오전.

  

 

  

*개요:  사회 속에 존재하는 성령님의 충만, 56충만, 1적용,

  

[]19: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19: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19: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19: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19: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사사기 19장에는 창세기 19장에서 나왔던 사건과 비슷한 일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죄악을 확인하기 위해서 온 두 명의 천사가 그 도시의 불량배들에게 고초를 겪을 뻔하였던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때 천사들은 불량배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들은 갑자기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스럽게 천사들은 악인들을 피해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즉시로 천사들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빼내었고 곧 이어서 유황과 불이 그 성에 떨어져서 모든 것이 다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그 재앙으로 인해 성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으니 그 불량배들의 눈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전혀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사사기 19장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불량배들의 악행으로 인해서 희생자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어떤 레위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밤이 되어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라는 성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한 집에 머물다가 불량배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레위인을 원했을 때 그 대신 그의 첩이 희생자로서 레위인에 의해서 불량배들에게 끌어내어졌습니다. 그녀는 밤새도록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다음 날 결국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이 25, 26절에 나옵니다.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19: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불량배들이 자신을 원할 때 자기 대신 첩을 내놓은 레위인의 행동도 옳게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보다도 레위인이던 그 첩이든 성에 찾아온 여행객을 해치고자 했던 그 성의 불량배들이 가장 악했습니다. 그 악함으로 인해서 피해자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9장에 비교했을 때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어떻게 심판이 이루어져야 했을까요? 다시 그 성에 대한 하나님의 유황과 불이 필요했을까요? 아니면 그 불량배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필요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는 인간의 재판과 그 재판을 통한 처벌이 필요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우리는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의 원리를 몰라서 그렇지 은혜의 원리를 깨닫는다면 은혜는 이 세상에 충만합니다. 그리고 그 충만한 은혜를 보게 되고 알게 되면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또한 자세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집니다. 생각이 달라지면 우리의 결정과 선택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과거의 유황과 불을 대치하는 어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나타나는지를 보십시오. 그것이 이후에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게 되는지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시면 유황과 불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유황과 불을 사용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다른 도구를 통해서 죄문제와 그로 인한 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고 계십니다.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신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 시신을 열두 덩이로 나누어서 각 지파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기브아성의 불량배들에 대한 처벌을 요청했습니다. 그곳에서 겪어야 했던 끔찍한 일들에 대한 억울함과 원한으로 인해서 그는 죄악에 대한 심각한 처벌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19: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온 이스라엘 지파는 함께 모여서 이일을 상의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군대를 소집해서 기브아에 가서 그 불량배들을 넘겨받아서 그들을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사기 2010절에 그 내용이 나타납니다.

  

“[]20: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그런데 이에 대한 기브아성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었던 불량배들을 보호하면서 그들에 대한 처벌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기브아성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들이었는데 베냐민 지파 자손들을 전부 모아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응해서 전쟁을 벌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심각해졌습니다. 원래는 한 레위인이 기브아성에서 당했던 억울한 일에 대해서 가해자인 불량배들만 처리하려고 했는데 기브아 성 사람들이 합세하고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베냐민을 제외한 열두 지파 사람들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일이 지파간 전쟁으로 확대되게 된 이유는 그들 자신 속에 있는 악인들에 대해서 비호하며 그들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명확하게는 그들 자신 속에 있는 악을 정당화하며 그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이스라엘이 르호보암때 두 개로 쪼개어져서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대 다른 모든 지파로 나뉘게 되자 전쟁을 시작해서 다시 나라를 하나로 하고자 했을 때에는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황과 불로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세상의 죄를 제거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스라엘 대 베냐민 의 전쟁에서 병력의 수는 이스라엘이 40만명이었고 베냐민이 267백명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20: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유다가 먼저 가서 싸움을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분명하게 전쟁의 시작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시작된 3번의 전쟁 끝에 마침내 베냐민 지파는 궤멸되었고 모든 불량배와 기브아성 사람들과 베냐민 지파까지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남은 자는 고작 6백명뿐이었습니다.

  

“[]20: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후대에 일어난 이러한 전쟁의 모습 속에서 이 세상에 넘치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양상만 달라졌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바로 죄악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을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을 통해서 심판을 이루십니다. 그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어느 한 편에 서야 합니다. 심판을 받는 입장에 설지 아니면 심판을 하는 입장에 설지를 결정해야 합니다하나님의 충만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심판을 하는 입장에 서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충만의 은혜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심판의 위치에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든 나와 상관없고 나와 관계없고 나의 대적에 대해서는 심판의 자리에 서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있고 나와 관계있고 나의 편에 대해서 심판의 자리에 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현재 재판중이거나 판결이 내려진 사안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판단을 합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충실한 법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고 유죄인지 무죄인지 구형된 처벌이 가벼운지 혹은 무거운지를 말합니다.

  

그것이 재판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정치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립니다. 정치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심판을 할 것인지 지지를 할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럴 때의 기준은 구체적인 근거나 나름의 확실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 아닙니다어디서든지 들어봤을 일반적인 소문과 알려진 내용들과 부정확하거나 근거가 불확실한 판단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보들보다 좀더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의 위치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성향과 방향성에 따라서 위치를 결정하게 되고 그래서 심판에 서거나 혹은 지지에 서거나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죄에 대해서 분명하시고 엄격하시며 확실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올바른 결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위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은혜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 비로소 이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한 레위 사람이 베냐민 지파의 성에서 불량배들에게 끔찍한 죄악의 일을 당했고 그것을 심판하기 위해서 온 이스라엘이 불량배들을 비호하는 베냐민 자손과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유다자손이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의 핵심은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은 자기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레위 사람이나 불량배들이나 베냐민 자손이나 이스라엘 자손들까지도 하나님의 선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넘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재판에서 혹은 정치에서 혹은 경제에서 혹은 문화에서 혹은 그 어떤 사회적인 분야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항상 아무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기 싫은 전쟁을 해야 할 때가 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으며 원하지 않는 대로 기대하지 않은 대로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충만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악은 때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퍼져가며 선은 때로 생각지도 않은 데에서 성취됩니다. 오직 그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섭리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사기 19장에서의 하나님의 충만의 은혜이며 그 이전에 창세기 19장에서의 하나님의 충만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넘치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깨닫고 항상 그분의 인도하심과 붙드심을 사모하며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자로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성도로 살아가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 1월의 설교제목: “사회: 사회 속에 있는 성령님의 충만

    

1) 1 11; 1-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면에 흩으심

  

2) 1 19; 23-29 뒤를 돌아다 본 롯의 아내

  

3) 7 19; 20-26 세상의 악행과 하나님의 심판

  

4) 44 7; 51-60 의인의 증거와 의로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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