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인] 1창 4; 1-8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1창 4; 1-8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_1
2019. 8. 18. 주. 주일오전.
*개요: 개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11개인-51계획, 3관점, 1오경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죄악의 결과로 인해 그들은 척박한 세상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에덴동산 안에서는 선악과를 먹든지 먹지 않든지라는 선과 악의 선택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죄 이후 에덴동산의 밖에서는 수없이 많은 선과 악의 선택이 생겼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환경이 좋습니까?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과일과 풍요로움이 넘쳐났습니다. 모든 생물은 인간에게 복종하며 인간은 광활하고 풍성한 에덴 동산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날 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그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빚어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이자 축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도 주셨기 때문에 그 생명나무를 먹으면서 인간은 영원토록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의 풍요로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선택했을 때 그 모든 풍요로움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셨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척박한 세상으로 내보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이었고 그들은 그 벌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더욱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고 수고로이 일을 해야만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을 다 살고 나면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그래서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때까지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세상살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앞으로 인생이 경험하게 될 지옥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는 형벌은 영원토록 지옥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살면서 지은 수없이 많은 죄악에 대한 심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한 가지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일생 동안 세상에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과 아벨은 세상에서 출생한 첫 번째 인간으로서 다양한 위기와 기회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을 경험하고 선악과를 직접 따먹었던 아담과 하와와는 달리 가인과 아벨은 에덴동산을 경험하지 못했고 날 때부터 세상에서 그들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도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각자 할 일을 주셨고 척박한 세상에서 이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들에게는 분명한 위기와 기회가 있었습니다. 위기는 척박한 세상에서 그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더욱 마음이 강퍅하게 된다는 것이고 기회는 이 척박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인과 아벨의 상황은 우리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서도 분명히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었거나 하나님을 경험했는가의 여부도 역시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거나 음성을 들었거나 그 나타나심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의 하나로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파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순종 여부가 믿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바로 그 위치에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자신의 직업에서 자신의 할 일 속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가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아벨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둘다 동일하게 자기 직업 속에서 자신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둘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고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나타난 상황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인의 반응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세상에만 존재하는 상황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애초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죄악된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위치가 죄인으로 낮아졌습니다. 또한 이미 선악과를 먹었고 온전한 자유의지는 사라졌습니다. 그럴 선택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또한 그럴 의지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더 받아들여지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다른 사람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기 자신의 존재는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 차이는 필연적으로 분노와 같은 감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뜻은 아주 분명하게 가인에게 나타났습니다.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이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아담이나 하와에게도 하셨던 것과 동일한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다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단순히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었지만 가인에게는 선을 행하라는 것과 죄를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 세대에서는 한 가지만 지키면 되었지만 부모 세대가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녀 세대에서는 여러 가지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 세대를 비교했을 때에 알게 되는 것이고 단순히 자녀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한다면 가인은 선을 행하고 죄를 다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벨처럼 진실한 제사를 드려야 했고 자기 마음에 아벨에 대한 격한 분노의 마음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일으키는 악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는가 악을 행하는가 하는 것은 각 개인이 선택하는 고유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그 선택의 결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이 받는 고유한 결과입니다. 선을 선택하고 선택하면 선택할수록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경쟁이 없던 에덴동산과 달리 세상은 모든 것이 부족하며 경쟁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고 수고하며 땀을 흘려야만 먹을 것을 얻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며 그 뜻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 죄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럴 때 선악과에 대한 말씀에 순종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채울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라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과 매 상황에서 그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아는 자가 됩니다. 지금의 21세기는 창세기의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났습니다. 더 많은 지켜야 할 것들과 더 많은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더 흘러서 22세기, 23세기가 되고 더욱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원리는 동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할 때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할 때 몸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쉬워지고 단순해지며 명료해지고 분명해집니다.
아벨의 선행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벨은 왜 하나님께 제사를 그렇게 드렸을까요? 사실 가인이 먼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그 다음에 아벨도 자신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어떤 면에서 가인을 따라 한 것이고 또한 가인보다 나중에 제물을 드린 셈입니다.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못했다는 것에 감정을 갖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면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단순한 양의 소산이 아니라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또한 그 새끼 양을 드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기와 기름을 나누어서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자 했던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감사와 복주심에 대한 기뻐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하나님은 그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고 그 예물에 대해서 증언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거하는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반면 가인은 결국 악행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먼저 제사를 드렸으나 거부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불순종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는 새로운 선악과를 따먹은 셈입니다.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유리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가 더욱 떨어진 지옥에 갔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계획입니다. 선악과를 계속 따먹는 악을 저지르면 더욱 위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선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러한 선을 행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기준을 보여주셨으니 그것을 찾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따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며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행하여 의로운 자로 서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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