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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역] 4민22;21-26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함



4민22;21-26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함


2010.3.28.주. 주일오전 [1영역]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면 다 존재하는 것이고 보면 다 믿어버립니다. 자신이 눈으로 보았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고 주장합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은 진짜입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세계를 사람들은 부인하였지만 마침내 그들이 그 세계를 보았을 때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 사람들은 지구가 네모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둥글었고 그것은 마침내 지구를 멀리서 보게 되었을 때 진짜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한번 보여줘봐, 그럼 내가 믿을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순진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을 거짓과 속임수로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너무나 실수가 많습니다. 마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이 사지가 잘립니다. 머리와 다리가 따로 놉니다. 분명히 보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믿지는 않습니다. 트릭이요 속임수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것을 진짜로 믿으시는 분은 안계시지요?
겉으로만 잘하는 데 속고 말로만 잘하는 데 속고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합성사진이고 연출된 영상이고 편집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로 믿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분명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는 말은 많은 헛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보았지만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는 말도 진실이 아니고 보고 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팽배한 세계 속에서 과연 우리가 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보는 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동일한 정치적 상황에도 첨예하게 의견이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똑같은 불경기에도 한쪽 당의 정치인들은 위기라고 말하고 다른 쪽 당은 기회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호경기에도 한쪽 당의 정치인은 우리가 잘해서 그렇다라고 말하고 다른 쪽 당은 세계 정세가 그랬을 뿐이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에 따라서 보고 마음에 따라서 믿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앞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는 그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워보이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는 정신병자같고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일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게 되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교회의 세속화, 내지는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되는 것일까요? 왜 그 모든 것을 싫어하고 귀찮아하며 미워할까요?

이 모든 것이 다 각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적인 소경은 이처럼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더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못봅니다. 그래서 영적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그들의 모습을 살펴 봅시다. 그들의 소경됨이 어떠했는가가 대표적인 영적소경이었던 발람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는 아주 지독한 영적소경이었습니다. 얼마나 앞을 보지 못하였던지 그는 자기 앞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발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나귀와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민22:23-25 23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그는 발락왕이 줄 수 있는 재물과 보상에 너무나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나귀만 열심히 채찍질 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너무 안쓰럽게 보여집니다. 애매한 나귀만 열심히 때리고 있는 그 불쌍한 모습이 안쓰럽게 보여집니다. 나귀는 지금 말도 못하고 (나중에는 말문이 트여졌지만) 열심히 맞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갈 수가 없고 안나가자니 주인은 때리고, 주인은 어리석게도 앞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못보고 자기만 괴롭히니 어떻게 나귀가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귀는 하나님이 그 입을 열어주셨을 때 주인에게 말할 수 있었고 그 격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람은 그 나귀의 말을 들으면서 눈이 열렸고 나귀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발람선지자를 지나치게 비하하였나요? 그래도 나름 선지자요, 하나님을 만나는 자요, 지금도 하나님의 허락을 맡고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왕에게 나아가고 있는데 그런 선지자를 너무나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닐까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십분 양보하여서 그가 지금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고 합시다. 본문에 나온 그대로 그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영적 존재인 하나님의 천사를 보지 못했고 나름대로 어떤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발락왕에게로 가는 여정에 대해서 조금도 미련이 없었다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를 한다 하더라도 발람의 가장 큰 어리석음에는 모든 사람이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영적인 소경이었는가 하는 것은 앞에 있던 천사를 보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론 그것도 영적 소경의 징후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결정적인 발람의 소경됨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민22:32-35 32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번 때렸느냐 ?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34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35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가니라”

하나님은 발람의 길이 패역함을 아셨습니다. 그가 왜 발락왕에게로 나아가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냥 몸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나아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막으려고 여호와의 사자가 길에 나왔고 그렇게 그를 죽이는 것이 그가 패역함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귀가 그를 살렸습니다. 나귀가 아니었으면 발람은 옛적에 죽었습니다. 발람이 그렇게 때리던 그 나귀가, 발람이 그렇게 자기 길을 막는다고 호통을 쳤던 나귀가, 평생을 함께 살아오고 한번도 그렇게 거역한 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에는 결사적으로 길을 막았던 그 나귀가 바로 발람을 살린 것입니다. 결국 나귀는 주인인 발람을 살리기 위해서 매맞았고 학대받았으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주인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귀의 희생은 별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길을 막아서 발람을 살렸건만 발람은 너무나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패역하였고 차라리 발람은 그곳에서 죽는 게 더 나았지만 나귀로 인해 살았고 더 나아가다가 하나님이 절대로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의 뒷모습은 발락의 귀족들에 에워싸여서 의기양양 나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있게 하나님께서 이르는 말만 하리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르지만 둘러싸인 귀족들은 그리고 그가 만난 발락왕은 결코 그가 하나님의 이르시는 말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락왕에게 악한 꾀를 가르쳐 주어서 결국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고 나중에는 자신도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결말과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보십시오.

“민수기 31:8 8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민수기 31:16 16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베드로후서 2:15-16 15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그는 분명 어리석은 선지자였습니다. 영적소경이었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가 없습니다. 나쁘게 보려고 하면 더 나쁘게 보여집니다. 그는 정말 미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미친 것은 그가 원했던 것은 그가 보고 있었던 것은 불의의 삯입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신의 불법을 인하여 나귀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나아가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늘 장황하게 발람의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영적소경됨이, 영적무지가 바로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나귀의 책망에도, 나귀의 저항에도, 나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악한 길을 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자 하는 그 발람의 기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때로 여러분을 막는 그 나귀는 평생을 여러분과 함께한 아내입니다. 남편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딸입니다. 여러분이 어린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구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이 주안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목사님입니다, 장로님입니다, 그리고 권사님, 집사님입니다. 때때로 이 나귀는 얻어맞으면서도 여러분을 막습니다. 학대를 받으면서도 견디어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막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옛적에 심판을 하셨을 터이지만 그 정성때문에 그 노력때문에 시간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어서 이날 이때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발람을 닮은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너무나 발람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악한 길을 가기를 거역하는 나귀와 그 길을 꼭 가려는 발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듯 여러분의 삶 속에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발람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나타나시고 있는 것일까요? 발람은 발락에게 나아가기 전에도 하나님을 2번 만났고, 이제도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 자신을 발람에게 보여주십니다. 발람은 너무나 많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만 준행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록 저나 여러분이 발람을 닮기는 했지만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면 여기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보지 못했지만 조금만 눈을 들여 여러분이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원하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귀의 말을 듣고 길을 돌이켜 새로운 길을 가게 되기를 원하시는가입니다. 여러분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발람처럼 되어버리겠지만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는가를 생각한다면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안타까움을 보십시오. 꼭 그 하나님의 탄식과 여러분에 대한 기대를 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주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소경이었으나 그 소경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력을 회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발락과 이름도 비슷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입니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의 빛을 보았을 때 눈이 멀었습니다. 그 영광의 빛이 그의 영적 소경됨을 드러내었습니다. 3일간 앞을 보지 못하던 상태에 있던 바울에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그 눈에 안수하며 이렇게 기도해줍니다.

“사도행전 9:17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그 예수님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탄식하시던 그 주님이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이방의 사도로 세우시겠다고 큰 계획을 아나니아에게 말씀해주신 그 주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눈이 떠졌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만 떠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전과 같이 다시 교회를 핍박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교회를 전파하고 확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진실로 눈이 떠진 것입니다. 육적,영적 눈이 모두 띄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뜨십시오. 영적인 눈을 뜨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소망하시고 기다리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원함만을 추구하다가 죽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돌이켜 새로운 길을 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이 쓰여서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영적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 고난에 참여하면 얼마나 큰 은혜가 있는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삶이 변하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부활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울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몸과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소망과 희망에 차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이번 주는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갈 것입니다. 역시 부활절도 그저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전히 여러분은 여러분을 제지하는 나귀를 때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뀔 생각은 하지 못하고서요. 그러나 하나님의 빛을 바라본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앞에 있는 은혜를 볼 것입니다. 다가올 축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가올 심판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할 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은혜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발람이 되지 말고 바울이 되십시오. 죄를 반복하는 자가 되지 말고 변화를 이루는 자가 되십시오. 발람을 주님은 세 번 부르셨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바울은 단 한번에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처럼 새로운 영적인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놀라운 변화로 인해서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시며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목차
1. 사람들이 보는 것은 항상 자신의 원하는 바에 국한된다.
2. 영적인 소경이었던 발람도 역시 자신의 원하는 것으로만 앞을 보려고 하였다.
3. 그렇게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에 나귀와의 갈등이 있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다.
4. 바울은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셨을 때에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5.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삶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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