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에는 대개 좋은 모습이 아니라 안좋은 모습으로 보게 됩니다. 목회자가 폭행,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른 기사를 보게 됩니다.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또한 장로, 집사님이 횡령, 사기, 위증 등을 저지른 기사가 있습니다. 너무나 가슴아픕니다. 또한 진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져 있던 연예인들이 자살을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너무나 슬픕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강도, 폭행, 살인, 강간, 횡령, 사기, 위증, 자살을 한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는 기사가 소개됩니다. 너무나 어이없습니다. 솔직히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기자들은 묘하게 그런 사람들을 기독교와 연관시킵니다. 그럴 때에는 억울합니다.
이처럼 신문이나 매스컴에서는 기독교와 관련된 범죄일 경우에는 더욱 자세히 소개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제발 그런 기사는 안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쪽으로는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대중매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삶속에서 경험하는 신앙인들의 삶의 수준은 이보다 훨씬 더 열악합니다. 실제로 죄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신앙인들이 삶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목표하는 수준이 너무나 낮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삶의 수준에는 네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이 삶의 수준이란 삶속에서 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나타나는 모습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설명을 드릴 테니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첫번째는 ‘영역분류’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여러 영역들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과 그와 관계되는 문제들이 의식되는 수준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계속 생겨나고 끊임없이 발생되고 잠잠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수준이 바로 ‘영역분류’의 수준입니다.
두번째는 ‘감정욕구’입니다. 첫번째 수준에서 좀더 격해지면 감정이 쉽게 고조됩니다. 언제든지 미움이나 분노나 절망이 교차하고 그로 인해서 욕구가 계속 터져나옵니다. 쉬고싶고 즐기고 싶고 먹고 마시고 싶고…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감정욕구’인 두번째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은혜결심’입니다. 삶속에서 끊임없이 은혜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새로운 마음들이 막 생깁니다. 사랑이나 희락이나 화평의 마음이 계속 생겨나는 것이 바로 이 수준입니다.
네번째는 ‘실천사역’입니다. 어떻게 하면 삶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깁니다. 충성하고 온유하고 절제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며 그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생활을 살아갑니다.
이 네 가지 삶의 수준에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첫 번째와 두번째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살아갑니다. 삶의 수준이 너무나 열악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신앙인들의 고민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가 올라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수준에 따라 우리의 삶의 수준도 더욱 상승하고 발전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최고의 삶의 수준에 이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수준의 구분은 원래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이와 사못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계단식 삶의 수준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삶의 수준이 형성된 시기는 신약에 이르러서입니다. 그 자세한 형성과정이 사도행전 10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가 성령충만을 받고 이방인으로써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이후에 이방인 전도는 봇물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온 지역에서 이방인 전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안디옥 교회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아주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준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 성도에게도 유대인 성도들과 동일한 기준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도 받게 하고 모세의 율법도 그대로 지키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성도들은 모두 첫번째나 두번째 수준에 해당하게 되었습니다. 결코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수준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높은 벽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지기 힘든 무거운 삶의 규칙들을 괴로움과 슬픔으로 지키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기준을 주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죄에 노예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죄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죄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요?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요?
도대체 삶의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가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으로 해오던 습관이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방인 성도들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으니 어떻게 그들의 삶의 기준을 정할 수 있을지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진정한 신앙적인 삶의 기준은 첫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베드로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애초에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성령충만이 임하는데 조력하였고 이후에 물로 세례를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견해는 해박하였고 적절하였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키게 하는데에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성도로 만들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이래도 그들이 쉽게 성도가 될 수 있을지 한번 해보시죠.’ ‘하나님, 그들이 할례도 받고 모세의 율법도 다 지켜야 한다면 성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한번 해보세요.’ ‘하나님, 저는 율법이 너무나 힘들고 지키기 어려워서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렇게 율법적인 부분에서 스스로 의를 추구하려고 하다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시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이러저러한 행위를 했으니 저에게 얼마나 축복을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뛰어난데 저를 얼마나 더 축복해 주실 건가요?’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이방인 성도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적인 삶의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삶의 기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면 안됩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율법적인 기준들이 있었습니까? 고작 기독교역사 130년을 헤아리는 우리에게도 바리새인들 못지 않는 제법 많은 율법적인 기준들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남녀가 함께 앉지 못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는 모자를 쓰지 못하고, 옷차림이 깨끗하지 않으면 안되고, 주일에 돈을 써서는 안되고, 성경책이외의 책을 읽어서는 안되고, 드럼 등의 소음이 심한 악기는 연주하면 안되고, 기타 등등의 여러 기준들이 있었습니다. 기준들이 세워질 때는 나름대로 오랜 고민과 생각 끝에 이루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기준들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런 것들이 혹시 우리 자신도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지게 하는 무거운 멍에는 아닌가라는 철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판단하면서 혹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변화되면서 문화가 개방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런 기준들이 사라졌습니다. 전에는 정말 그런 기준들이 중요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입니까?
이제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이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되면 안됩니다. 자신도 지지 못할 멍에를 다른 사람에게 지우면 안됩니다.
3. 진정한 신앙적인 삶의 기준은 둘째,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삶의 기준도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요? 기준 자체가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앙은 유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안다니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꾸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 해도 삶 속의 죄성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그 다음으로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여기서 시므온은 베드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어떤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모서 9장 11,12절의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라는 부분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기준의 목표는 신앙의 유지가 아닙니다. 신앙의 발전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을 찾게 만드는 것이 삶의 기준을 갖는 목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신앙적인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술을 금지합니다. 담배를 피지 않게 합니다. 음란한 것을 접하지 않게 합니다. 남을 때리지 말라고 하고 사기치지 말라고 하고 뇌물과 횡령과 기타 위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분명한 삶의 기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잘 섬기고 목사님의 말을 잘 듣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목사님을 잘 섬기지 않아도 그 말을 잘 듣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아프게 해도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성도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님을 무시하고 목사님을 때리고 목사님한테 사기치고 목사님을 죽이고 목사님한테 거짓말하고 그런다면 그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악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국에 가게되면 그 때에도 여전히 죄의 유혹들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은 온전한 의와 완전한 선이 넘치는 곳입니다. 유혹은 근원인 사탄은 지옥에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시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유혹을 통해 시험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죄의 유혹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듣거나 보거나 접하거나 행하지 않으려는 노력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죄 가운데 있다면 그 죄를 벗어버리려는 노력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 그 죄를 얼마나 어떻게 지었는가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다만 어떤 죄이든지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노력속에서 진정한 신앙이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세상속에서 더욱 단련되도록 아직도 우리를 이곳에 두신 것입니다.
4. 우리는 신앙적인 삶의 기준을 통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여러가지 복잡한 현대의 문제들에 대해서 오늘 성경말씀이 가르쳐주는 이 신앙적 삶의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술과 담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쉽게 끊을 수 없는 술과 담배의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은 알지만 술과 담배의 문제가 자신을 괴롭힙니다. 만약 여기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계속 아무 생각없이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어디 얼마나 마셔야 피워야 나를 벌주시나 보자’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술과 담배는 내가 버리지 못하는 우상이 됩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술과 담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의 팔을 생각하며 버리려고 애를 쓰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욕구는 결코 내가 버릴려고 하지 않는데 저절로 버려지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내가 버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술,담배를 끊을 마음이 없었는데 어느날 은혜를 받아 끊는 것이 아닙니다. 술,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했는데 어느날 은혜를 받아 끊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라가시는 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음란물과 혼전성관계와 동성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은 결코 적당히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끊어버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그럭저럭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도로 경험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완전히 끊어버릴 때에만 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전부 간음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십니다. 음란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혼전성관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동성애를 추구하지 않을 담대함을 주십니다. 이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문제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더 높은 삶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각각의 삶의 수준들을 거쳐야 합니다. 또는 지금은 높은 삶의 수준에 있다 하더라도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우리들은 밑으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삶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포기하고 절망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붙들지 않고 포기해 버리면 삶의 수준이 끊임없는 문제로 떨어집니다. 1단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악한 감정과 욕구를 붙들고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러한 자가 지금 당장은 버리지 못하는 죄를 1년후면 버리고 5년후면 버리고 10년후면 버립니다. 일년 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죄를 가지고 있고, 5년후, 10년후에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지금부터 노력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하나님이 주신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술담배가 싫어지고 음란물과 혼전성관계가 불편해지고 동성애가 끔찍해질 것입니다. 그이외에 다른 죄문제들도 역시 동일하게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2단계의 감정욕구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외경(外經, Apocrypha)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데...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이제 저 높은 산에를 올라갈 터인데 큰 돌 2개씩 가지고 올라가자...”그래서 제자들은 큰 돌을 2개씩 골라 들고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가장 큰 돌 2개를 어깨에 메고는 낑낑대며 끝까지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처음에는 큰 돌 2개를 들고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한참 올라가다가 그 돌을 내려 놓고는 그 보다 좀 작은 돌로 바꾸어 메고 올라 가더니 나중에는 아예 조그마한 조약돌 2개를 주머니에 넣고는 산에 오릅니다.
산에 다 오르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그 돌들을 각자 자기 앞에 놓게 하고는 식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식사를 하는데 제자들이 가져온 돌이 바로 떡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장 큰 떡을 먹게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조약돌만한 떡만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삶의 수준이 결국에는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여러분의 상급의 수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정말 버려야 할 죄와 씨름하십시오. 정말 이겨야 할 삶의 버릇들과 싸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성숙하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회의를 마친후 사도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안디옥교회에 다시 돌려보내며 이런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8,29절 말씀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평안의 축복처럼 우리가 스스로 삼가서 더욱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더욱 평안함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2분류-선악]~[5은혜-능력]
1. 신앙인들의 삶의수준에 대해서 어떤 기준을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2. 진정한 신앙적인 삶의 기준은 첫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3. 진정한 신앙적인 삶의 기준은 둘째,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4. 우리는 신앙적인 삶의 기준을 통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