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중동지역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은 엄밀히 말하면 단순히 지역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은 이 세상에서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보내셔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죽음으로써 갚게 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주로부터 거대한 혜성이 지구에 충돌한다고 가정할 때, 이 지구의 어느 한 지점에 충돌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전 지구가 영향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메리카대륙이던, 유럽이던, 아시아이던, 아프리카대륙이던 어느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로 인한 영향력은 지구전체를 뒤덮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인종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는 엄청난 영향력이 되어서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의 수도에서 있었던 한 죄수의 죽음의 가치는 온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었고 온 시대를 뒤덮는 것이었으며 온 나라에 미치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셨고 죽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들은 그 죄사함의 효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은 결코 한 지역적인 가쉽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몇몇 사람들을 통해 이 소식을 세계에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이 있을 것임을 알고 그 이름을 힘입어 번제를 드리고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다 그 순간 그 효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시대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에게는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예수님의 사도들을 통해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이후에 태어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사도들에게서 배운 또 다른 제자들이 그 소식을 전하고 전하고 전해서 계속해서 이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들을 이루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들과 제자들은 그 말씀에 따라서 그 일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또 전파되어서 인종을 넘고 국가를 넘고 지역을 넘고 시대를 넘고 후대로 흘러 흘러서 바로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사명과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사도들과 제자들에 이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자이심을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2.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사람은 그로 인해서 죄사함을 받게 하셨다.
그런데 2천년전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그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정말로 그 복음의 혜택을 얻게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지가 2천년이 지났고 그 시대에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접어드는 때로서 고조선에서 부여, 동예, 고구려, 삼한 등의 나라가 형성되는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때였습니다. 드라마 ‘주몽’의 배역이 되는 때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가 그런 일이 있을 때에 멀리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후 우리나라가 원삼국시대에서 삼국시대가 되고 이어져 남북국시대가 되고 후삼국시대가 되며 고려와 조선이라는 나라가 형성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에 이르고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후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그리고 아시아까지 복음은 온 세계에 두루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 복음은 온 나라와 온 민족에 퍼졌고 하나님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구원사건은 한 지역, 한 민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온 지역과 온 민족에까지 퍼지고 이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1866년에 복음이 들어오지 않고 866년에 복음이 들어왔다면 어땠을까요? 그 시대는 통일신라시대인데 그랬다면 그 시기 이후부터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1866년에서야 복음이 들어왔지만 그것도 신미양요로 이어져서 도리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더욱 단호하게 뿌리박히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때라도 미국과 교역을 하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을 거부할 때에 그 다음번에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188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음으로써 우리나라는 엄청난 시련의 소용돌이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현대사에서도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민족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지만 반면에 복음을 거부하는 민족은 구원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단지 영적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삶의 구원도 함께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민족들이 다 매우 풍성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복음이 아닌 더 악한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가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단지 제한된 지역의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고 온 천하에 전하여 복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들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3. 그러나 이러한 복음의 전파를 거부할 때에 사람들은 실족하게 되고 스스로 망하게 된다.
이를 위해 맨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즉 사도들이 수고를 했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수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그 뒤를 있는 성도들이 계속 해서 나타나서 그들은 자신들만 믿고 끝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가족이 믿게 하고 자기 자녀가 믿게 하고 자기 이웃이 믿게 하고 자기 친구가 믿게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먼 곳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전파된 복음이 바로 우리에게도 이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 복음의 전파의 흐름속에 서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복음이 우리 가족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친척들에게, 우리 친구들에게, 우리 동료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복음의 길이 형성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만 복음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사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여러분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나타내지도 않고 오히려 숨겨가면서 살아갈까요?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럴까요?
이러한 문제는 신앙의 수준별로 다가오는 깊은 고민입니다. 예를 들어 요나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나중에 결국 우여곡절끝에 니느웨로 갔을 때 그는 하룻길을 전도했을 때 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으며 회개했었습니다. 그렇게 능력있는 전도를 할 수 있었던 요나가 왜 처음에는 그렇게 그곳에 가지않으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엠마오의 두 제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왜 예루살렘에 거하지 않고 엠마오로 내려갔을까요? 그들이 누구이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누구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상심하고 절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상심하고 절망하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부족해서 무엇이 문제여서 자신들이 있어야 하는 곳을 떠나고 있었을까요?
다른 예로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3년간이나 주님과 함께 있었던 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해버립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그 누구보다도 힘차게 고백하던 자가 왜 대제사장의 사환들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였을까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동일한 열정과 큰 목소리로 빌라도에게 외쳤습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바라바를 놓아주소서!’빌라도는 다시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그때 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어쩌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요나는 니느웨에 가지 않았으며, 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으며, 왜 베드로를 주님을 부인했으며, 왜 예루살렘 백성들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을까요? 그들이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그들 자신들의 신앙수준에서 실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던 자가 갑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자가 성령충만을 거부해 버립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자가 그 확신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그 믿음을 부정합니다. 그럴 때에 그렇게 실족하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보다 더 무섭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었지만 그것을 버린 자들이 더 냉소적입니다. 성령충만을 거부하기 시작할 때 너무나 강퍅해집니다. 사명감당을 정면으로 거부할 때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죄인이 되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날 차라리 죽여주시오! 하나님은 요나가 회개하기를 바랬지만 요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각 사람의 신앙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실족하면 우리도 죄로 떨어지게 됩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신뢰하는 자들로서 그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신앙수준이 어떠하든지 공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책임과 의무를 갖습니다. 우리가 그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우리가 받았던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도 그 가치가 바래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수준은 어디입니까? 손을 들어 여러분의 신앙수준을 보여주십시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의 신앙수준을 표현해주십시오. 신앙수준이 어느 정도라면 그정도는 삶속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전도의 책임을 각자의 신앙 수준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은 실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은 자들보다 더욱 강퍅하고 죄를 많이 짓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은혜받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을 통해 고넬료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고넬료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될 때 그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적시에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일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오늘도 은혜를 주셔서 가지고 있는 신앙대로 그 신앙을 나타내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이렇게 설명했을 때에 고넬로와 함께 모인 무리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고 바로 그 책임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에 성령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주님의 채움을 얻는 길 밖에 없습니다. 발전은 고사하고 유지조차 안되서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5은혜-계획]~[5은혜-충만]
1. 하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리게 하셨다.
2.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사람은 그로 인해서 죄사함을 받게 하셨다.
3.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전파를 거부할 때에 성도들은 실족하게 되고 스스로 망하게 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신뢰하는 자들로서 그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