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신자들 중에는 감정의 단계에서 더 멀어져서 불신의 구체적인 이유로 떨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생성과 발전을 위해서 불신자들을 믿음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지만 의외로 신자들이 불신자로 변해가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체감적으로도 기독교에서 무교로 전향한 예나 기독교에서 타종교로, 특히 천주교로 발전한 예들은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애써 퍼담으려고 하지만 사실은 줄줄 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막지 않는다면 여전히 퍼담으려고 하면서도 남은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퍼담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방식으로 퍼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신자들이 불신자가 되고 불신자가 어떻게 더욱 큰 불신자가 되어서 심지어 핍박자까지 되는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감정에서 더 뒤로 밀려서 문제 그 자체로 떨어지는 것을 이해하고 그럴 때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가입니다.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욕구가 있는 사람보다 복음에서 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멀리 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불신의 이유에 푹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불신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감정상태에서 더욱 하나님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감정이 다소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복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더 휩싸이게 된 것은 문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불신의 정도가 더 강해진 것이며 더 완고해진 것이며 더 강퍅해진 것이 됩니다.
감정상태에서도 욕구를 깨닫고 그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하면 더욱 복음으로 들어올 수가 있게 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불신의 이유 그 자체에 빠지게 되면 그 이유의 분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체적인 이유에는 여러가지의 분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도 각각 감정과 분류에 해당하고 있는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24절을 함께 봅시다.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에게 대해서 네가 미쳤다라고 말하는 이 베스도 각하는 분명 감정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서는 분노나 절망 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신의 상태에 해당하면서도 그 단계가 욕구보다는 조금 더 멀리 있는 감정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아그립바왕은 조금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누가 더 복음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일까요? 베스도보다 아그립바가 더 멀리 있습니다. 그는 감정도 가지지 않고 불신의 이유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그립바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혹은 믿지 않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그립바의 말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에 대한 하대, 과소평가, 가소로움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가 뭔데 몇 마디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라는 어이없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그립바 왕의 말이 분노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말은 더 넘어설 수 없는, 다시 말해 베스도처럼 감정이 격동하게 되는 상황도 아닌 더 심드렁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그립바왕은 더 큰 불신의 이유에 처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단순한 한 마디의 말 속에 숨어있는 그의 불신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 아그립바왕은 조직의 문제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에게 있는 문제는 조직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위치는 너무나 높습니다. 바울의 위치는 너무나 낮습니다. 바울이 다른 분봉왕도 아니었고 고급 귀족의 계급도 아니었습니다. 로마인의 시민권은 있었지만 그는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보통 로마시민에 불과하였지 로마시민 중에서도 고급귀족에 해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바울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겠습니까? 커다란 신분의 격차가 있었는데요. 그래서 아그립바왕이 ‘네가 감히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구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이런 저런 불신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 합의의 문제, 선악의 문제, 조직의 문제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한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갑니다. 우리 자신도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 바로 그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그립바왕의 불신의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요한 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그가 고백한 것은 말이 적던 많던, 그의 신분이 높던 작던 어떤 식이든 그 문제를 극복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불신의 이유가 불신으로 남아있게 하는 당위성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신을 이겨내기를 문제를 극복하기를 바래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4. 우리는 바울처럼 불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많은 성도들이 불신자들의 이유를 들으며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할 때, 가족들과 합의가 되지 않았다고 할 때, 죄의 문제를 버리기 어렵다고 할 때, 상하의 계급의 문제가 있을 때 믿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들은 그런저런 이유로 거부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극복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원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이 나쁜 죄에 빠져 있는 것을 늘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극복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을 때 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셨고 마침내 주님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세계 최대의 부자였던 록펠러는 53세에 최대의 부자가 되었지만 불치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6장 38절의 "주라, 그러면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록펠러재단을 설립하고 ‘주는 방법’을 연구하였고 그로 인해 건강과 생기를 찾게 되었으며 98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가지 불신의 문제에 있는 자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2.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긍휼하심을 통해 진정한 문제해결을 받아보십시오. (2성자: 죽음부활)”
복음에 대한 온전한 설명 속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을 증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