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교육] 38갈 3; 10-14 저주에서 축복으로 가는 길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38갈 3; 10-14 저주에서 축복으로 가는 길2_2b
2019. 6. 16. 주. 주일오후.
*개요: 성경비전,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경연구방법인 극본적 해석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은혜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극본적 해석은 ‘1발단, 2전개, 3절정, 4결말’로 본문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발단으로 가장 시작이 되는 부분은 저주 아래에 있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란 궁극적으로 처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만들어 내면 낼 수록 그것은 죄를 대응하기 위한 것이고 그 죄에 대해서 결국은 저주를 주기 위해서 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자연히 저주의 대상이나 아니냐의 문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 속에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법이나 규칙을 만드는 이유는 처벌을 받을 것이냐 받지 않을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법이나 규칙을 만드는 이유가 상이나 칭찬을 줄 것이냐 안줄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좋은 쪽은 사실 아무런 법이나 규칙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없어도 마음만 전달되면 충분히 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율법행위에 있는 자들은 항상 우울합니다. 왜냐하면 잘해도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 잘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모든 삶의 시작입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에서의 두 번째 단계인 ‘전개’를 생각해 봅니다. ‘2.전개’는 의롭게 되는 이유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최소한의 수준에까지는 이를 수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단지 쫓겨나지 않으려고, 단지 맞지 않으려고, 단지 밥을 먹을 수 있으려고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그 수준에만 머무를 뿐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더이상 성장과 발전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도 그저 퇴학당하지 않고 사직당하지 않을 수준으로만 살아간다고 하십시오. 너무나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그 시절이 얼마나 의롭지 않을 것인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공포와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들의 율법의 행위로는 결국 의롭게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해야 한다, 혹은 해서는 안된다는 행위의 목록으로는 결코 의로움의 경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닮은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로움으로 올라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에 대한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 죄의 저주를 끊어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해결책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시동이 걸리고 기어가 들어가 있으면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잡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전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전진하는 것은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엔진에 많은 연료가 주입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놀라운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되게 하신 놀라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정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절정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놀라운 믿음의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저주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영영 돌이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그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속량’이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속량이라는 말은 ‘redeem’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빚을 청산하다, 현금으로 교환하다, 돈을 주고 되찾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이 쓰이는 모든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율법의 저주를 모두 자신의 피로써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그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가 이루어졌습니다. 빚 갚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빚이 남아 있으면 또 빚이 됩니다. 빚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은행 빚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금액에 있다면 대출이 해제되지 않습니다. 그 빚을 완전히 청산해주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속량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여전히 숨어다니고 피해다니고 속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해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풍성한 기름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그분을 통한 의로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의 ‘4.결과’는 그리스도로 인해 속량함을 받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동행하심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은 성령의 약속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약속은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잊어버린 줄 알았던 자녀를 다시 찾은 부모가 그 자녀를 이제는 결코 버리지않고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채우시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부르십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영적 자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나아갑니다. 율법의 행위는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에 대한 의지함은 우리가 ‘축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성령의 약속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게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기억하며 삶 속에서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붙들고자 하면서 살아가며 믿음을 더욱 온전히 붙들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성령의 약속이 우리 삶 속에 충만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생활 속에서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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