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연합] 44행 4; 32-37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들이 없음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44행 4; 32-37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자들이 없음2_2f
2018. 8. 5. 주. 주일오후.
*개요: 신앙비전, [행]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행]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룹니다. 은혜가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은혜는 이루어 냅니다. 그것은 마치 기적과도 같습니다.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며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욕망을 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만듭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마라의 쓴 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나무를 물에 넣으니 그 물이 달게 되어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가 정반대의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 은혜가 있느냐와 없느냐에 따라서 그 헌신의 모습은 땅에서 올라 하늘로 가기도 하고 반대로 땅으로 떨어져 바닥에 깔리기도 합니다. 단지 행동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받으시기도 하고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의 행동만 보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놀라운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랬는지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지 않으면 엉뚱한 방식으로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읽은 이 본문말씀은 공산주의를 생각나게 합니다. 공산사회의 이상도 이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러나 성경적인 아름다운 모습이 공산주의의 흉악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이유는 그 속에 은혜를 담은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의 죄성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면 할 수록 그 나눔의 모습은 변질되고 이용되고 타락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깊게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행]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그 은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무리들은 큰 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주 예수의 부활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가 성도들에게 공급되었고 그로 인해서 성도들은 은혜로 충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단지 사도들이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는 것 만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럴 때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는 것으로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정말 큰 능력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되기만 하면 성도들은 항상 은혜를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어서 결코 따라할 수 없고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인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일까요? 물론 우리는 단지 사도행전의 일들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일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시기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수준이 있어서 그 시대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셨던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결코 인간이 모방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과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여 은혜를 얻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서 예수님의 기적은 정말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신성의 표현이지만 사도들의 증거는 우리가 따라할 수 있고 또한 본받아야만 하는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좀더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던 원리는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정확히 같은 방식이나 같은 결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같은 원리로서의 결과는 지금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때의 일들을 정확히 재현한다는 것은 그 어느 때에도 불가능한 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지만 원리가 반복될 뿐이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은혜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온전한 마음과 정직한 방법으로 증거될 때에 사람들은 그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리고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가 바로 사람들의 삶이 변하는 것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밭과 집 있는 자들이 팔아서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밭과 집을 팔기로 결정할 때에도 그리고 그 판 값을 손에 쥐었을 때에도 그리고 그것을 가져와 사도들에게 바칠 때에도 성도들은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밭과 집을 팔기로 결정할 때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러다가 번복합니다. 시험에 빠집니다. 또는 그 단계는 넘어서서 판 값을 손에 쥐었을 때에 많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하고 또 주저합니다. 그러다가 그냥 눌러 앉습니다. 또 그 단계는 어떻게 넘어섰다 하더라도 막상 가지고 와서 사도들에게 놓을 때에도 엄청난 고민과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이 정도 되면 도대체 왜 애초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의심해보게 됩니다. 은혜로 시작하지 않은 일들은 결코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은혜의 반응은 다 하나님께 올라가지만 은혜가 아닌 반응은 아무리 위로 올려도 전부 다 땅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의 반응을 하였고 그 반응이 자신의 것의 소유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정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으로는 어떤 것도 이런 성도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은혜의 고리는 마지막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마지막이 없다면 은혜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하면 사도들이 그 밭과 집을 판 돈을 받아서 어디에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능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신 이유는 그리고 그 증거를 받고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게 하신 이유는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아서 자신의 소유를 팔아 주님께 가져온 이유는 모두 그 다음 단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 중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에게는 계속 은혜가 부어졌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 공정한 집행을 보면서 또 다시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오늘날 각 사람에게는 영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필요를 위해서 성도들의 정성이 사용되어집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은혜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려고 하고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은혜를 증거하고 은혜를 얻는 삶’입니다. 그로 인해서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고 헌신하고 희생하여 헌납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은혜를 증거하고 은혜를 얻어서 은혜에 핍절한 사람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말세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껍데기만 남을 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다면 우리 삶은 놀랍게 달라집니다. 어떻게 달라질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각 시대마다 행하신 은혜와 그 은혜를 통해 이루신 일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분명 새롭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자 할 때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밭과 집을 팔게 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교회에 바쳐서 그로 인해 성도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얻게 되면 무엇을 하게 될 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어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인가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통해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물질을 드렸는데 그 이유는 은혜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랬기 때문입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행]4: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밭이 있는 사람은 그 밭을 팔아 집을 사기도 하고 더 큰 밭을 사기도 합니다. 혹은 그 밭을 팔아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 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더욱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는 자들이 됩시다. 그 은혜를 통해 우리 인생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더욱 자유로운 자들이 되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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