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교육] 41막 5; 35-43 죽은 소녀를 일으키시는 주님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41막 5; 35-43 죽은 소녀를 일으키시는 주님2_2b
2018. 6. 17. 주. 주일오후.
*개요: 성경비전, 극본적 해석, [막]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막]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막]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막]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해석을 하거나 문화, 역사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정치적인 해석이나 과학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보려고 하는 의도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단순히 성경을 본다고 해서 다 성경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악의적으로 볼 때에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이단들은 동일하게 성경을 보지만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사탄의 뜻을 발견합니다. 타종교인들도 성경을 강해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자기 종교의 정당성만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해석할 때만이 가장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성경을 통해서 사탄으로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올바른 성경해석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마주치게 될 해석에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방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가장 진실하신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극본적 해석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각자의 수준과 입장에서 본문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극본적 해석의 네 가지 요소인 ‘발단, 전개, 절정, 결말’에 따라서 성경 속에서 발단을 찾고, 전개를 찾고, 절정을 찾고, 결말을 찾을 때, 본문에서 나오는 중요하고 의미 있게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발견한 부분이 그 구절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신의 묵상일 뿐입니다. 자신이 은혜 받은 구절에 밑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그럴 때 성경이 단순히 평이한 내용에 머무르지 않게 하고 자신 만의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요소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 1발단은 사건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말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그 다음을 궁금하게 하고 더욱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관심을 갖게 합니다. 2전개는 그 이후에 나타나는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행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보여지는 절정을 향해 올라가게 합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절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3절정은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깊은 인상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절정이 없다면 극본적인 해석은 별로 흥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정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날 때 우리는 전체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4결말에 이르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는 모든 이야기가 어떠한 결과로 마무리 되는지를 깨닫습니다. 이와 같은 극본적인 구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극본적인 해석을 해볼 때 구절별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때 어떤 부분이 첫 번째 발단에 해당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35절부터 38절 사이에서 어디까지 발단으로 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막]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막]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막]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막]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이 중에서 어떻게 ‘1발단’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전반적인 구성에 차이가 생깁니다. 35절만일 수도 있고 35,36절일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35,36,37까지도 발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우리는 35,36절만 발단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발단: 35, 36절] “[막]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막]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모든 일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시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도 시작하게 되었고, 그래서 교회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도 들어갔고, 직장도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모든 일이 시작하자마자 완성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이제 시작한 것 뿐입니다.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2전개’를 생각해 봅니다. 35,36절이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구절이 전개가 될 것입니다. 37절부터 40절 사이에서 어디까지 전개로 보면 좋을까요? “[막]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막]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이 구분은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 각자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저의 기준에 맞추어서 생각해 봅니다. 저의 기준으로 볼 때에 우리는 37,38,39절까지 전개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데리시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2전개: 37-40절] “[막]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막]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이러한 전개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단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훤화하며(소동하며) 울며 심히 통곡하였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이 아이는 자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명히 병으로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났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는 그가 잠들었고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늘 우리에게는 종말이지만 주님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전에 주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했던 말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전개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하십니다.
오늘날 모든 삶에 대해서 주님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십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 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우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성도들은, 우리의 이웃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깨우심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개 과정 속에서 절정이 기다려 집니다. 주님은 어떻게 절정을 이루실까요? 41절부터 42절까지 를 절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절정: 41-42절] “[막]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소녀야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달리다’가 일어나라(ταλιθα, talitha)는 말입니다. 그리고 ‘굼’이 소녀(κουμ, koum)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고,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 아이에게 다가 가셔서 손을 잡고 ‘소녀야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를 깨우신 것입니다. 그 아이를 깨우시는 능력이 바로 주님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은 변화시키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신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4결말’을 살펴봅니다. 결국 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 나타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머지 부분이 그 결말이 됩니다. 43절입니다. [4결말: 43절] “[막]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영광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더 드러나야 할 것 같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왜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사람들이 기적을 행한 자신보다 기적을 체험한 그 소녀에게 더 몰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나친 관심이 소녀를 힘들게 할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심으로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주님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게 나타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기적의 사건이 전파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극본적인 해석을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에게서 기적을 분리해 내지 말고 그 기적의 근본이시자 핵심이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적을 볼 수 있는가 없는가나 우리가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이러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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