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삶에는 쉬운 일들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들도 일어나고 슬픈 일들도 일어납니다. 그런 일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중에 한 예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고 병을 앓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불행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과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람은 자기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다보니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스드라에 살고 있던 앉은뱅이의 삶이었습니다. 평생 한번이라도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아무런 소원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관원들이 욕을 하며 돌을 치려고 했기 때문에 루스드라로 피신해 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신해 온 곳에서도 그는 복음 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때 마침 그 앉은뱅이는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울을 만났던 것입니다. 이전에 죽을 고생과 반대를 무릅쓰며 복음을 전했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력이 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두려워하였다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좌절해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기는 커녕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에 대해서 도리어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기 때문에 루스드라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그렇게 해서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는 여러 사람중에 그 앉은뱅이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가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빛을 보며 그의 열정을 보며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았을 때에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말했고 그 사람은 뛰어서 걸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바울과 그 앉은뱅이만 봅니다. 바울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는‘제우스’요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우스나 헤르메스는 유명한 그리스 신들인데 바로 바울과 바나바가 그런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그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일 뿐이고 정말로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분은 따로 있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하였습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의 옷을 찢으면서까지 말하였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런 바울의 태도를 이상하게 여길 지 모릅니다. 그냥 내버려 두지 왜 그렇게 까지 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마술을 처음 볼 때에는 신기해 하지만 그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더이상 신기해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예전에 저의 딸아이를 위해 마술용품을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손수건에서 지팡이가 나오는 것과 그림이 사라지는 공책, 그리고 종이를 뚫는 볼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원리를 알고 나니까 너무 쉬웠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람들앞에서 보여주는가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보여준다음에 사람들이 원리를 알지 못해 너무나 신기해 한다면, 그리고 신기해한 나머지 여러분을 신으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사람들 앞에서 신이되시겠습니까? 아마 양심이 있다면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바울도 옷을 찢으며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앉은뱅이를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능력이 있었고 앉은뱅이에게는 그 능력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이를 중재했던 것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그 능력이 오늘날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듯이 우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앉은뱅이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보여준 신비함을 한꺼풀 벗기고 들어다 보면 그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은 그분이 이 세계를 만드신 분임을 기억한다면 간단히 설명됩니다. 세계를 만드셨는데 그 앉은뱅이도 지으셨는데 그를 못 일으키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일어났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일어나면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많은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여러가지 불신과 의혹을 제기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많은 불신과 의혹을 이 자리에게 다 풀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 분께 돌아오면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모든 의혹과 의심을 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보겠다고 한 도마에게조차 예수님은 그럼 넣어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의심이 정말로 믿지 못하는 이유라면 하나님께 나와보십시오. 어떤 의혹이든지 주님은 낱낱히 해소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로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한낱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 하나님은 왜 그를 일으키셨을까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바울의 복음전파를 듣고 믿었던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나아오십시오. 그럴 때 우리를 일으켜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다시한번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힘을 얻으십시오. 일어나서 달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십시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