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성탄절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날에 우리들은 이미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탄절의 기쁨과 감사는 모든 사람들의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 기쁨을 누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은 성탄절을 빌미로 해서 자신을 즐기고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마치 석탄일의 즐거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공휴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구별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기독교인 대 불교도인 일까요? 아니면 기독교인 대 무교인 일까요? 아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잔치요 축제인 성탄절에 불교인이나 무교인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하나의 공휴일로 생각하고 더욱 먹고 마시며 떠들고 놀 것입니다. 진정한 구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 대 어떤 기독교인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만나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보고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만나고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어도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일까요?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해온 동방박사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그들의 방문으로 인해 유대인의 왕이 나셨음을 깨닫고 소동하고 있는 헤롯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전부터 예수님의 찬란한 별을 보았습니다. 그 놀랍게 반짝이며 어느 별들보다도 더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한 별을 보면서 동방박사들은 그 위대한 탄생에 경배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별을 따라 이스라엘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그 유대인의 왕을 찾기 위해서 헤롯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바라보는 별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별은 목적지를 찾기 위한 나침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지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도움을 받기 위해 헤롯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 도움이 없이는 더이상 진전할 수 없었습니다. 헤롯왕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에게는 지도가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연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에는 다소 당황하며 소동하였지만 냉정을 되찾고 차분히 말씀 속에서 유대인의 왕, 메시야에 대해서 연구하였을 때 이내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가 5장 2절에 나온 한 글귀였던 것입니다.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세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보다 더 명확한 구절이 어디있겠습니까? ‘베들레헴’ 바로 그곳이 메시야의 나심의 장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보물지도를 찾은 것처럼, 그 어려운 한 글귀를 해석한 것처럼 이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낯선 동방박사들의 출현을 통해 헤롯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어디서 나는 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장면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헤롯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그 귀중한 정보를 동방박사들에게 건네주었을 뿐입니다. 마치 보물을 찾기 위한 지도를 발견하고서 그것을 넘겨준 셈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함께 가지 않았을까요?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나셨다는데 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까요? 처음에 동방박사들이 새로운 왕이 나셨다고 했을 때에는 난리법석을 피우며 온 성이 요란하게 소동하던 그들이 왜 막상 자신들의 왕을 찾으러 가는 일에는 무관심했을까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왕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왕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분을 만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들은 제때에 그리스도, 메시야를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냥 갔다 와서 알려달라고만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배하겠다는 것이지요. 그건 말뿐입니다.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허세요 거짓말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구별이 우리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늦게 믿어 열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삶의 구주임을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한 초신자들에게 있어서 오래된 신자들의 도움은 필수적입니다.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어디서 만나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초신자들에게 기존의 신자들은 모든 것을 자세히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박사요 해박한 성경지식의 소유자들입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너무나 잘압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도무지 움직이려 하질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수백가지의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해는 되지만 그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말로는 무슨 소리를 해도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런 표현은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려고 했다면 함께 움직였을 것입니다. 지도와 나침반이 있다고 해서 보물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은 정말로 왕을 찾고자 했고 그러한 자들에게 지도는 너무나 소중한 정보였습니다. 하지만 왕을 별로 찾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지도란 그냥 자신이 그만큼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허세였을 뿐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들에게 성경이란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해주는 자료가 되지만 예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경지식이란 자기 자신을 더 똑똑하게 보이고 멋있게 보이고 지혜롭게 보이게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지만 자기의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확증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는 것도 아닌,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 오직 왕에게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기 위해서 움직이며 노력하고 애를 쓰는 동방박사들과 같이 자들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어떻게 해서든지 무엇인가를 드리기 위해서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에 중요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피해서 평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쁨에 넘쳐서 말이지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귀찮아 했고 번거롭게 생각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유익을 더욱 구했습니다. 헤롯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래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냥 머물러서 동방박사들이 나중에 안내해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그들은 그냥 만나지 못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포악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미움과 분노와 절망과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폭발했습니다. 제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렇게 그들의 죄성과 감정으로 하여금 폭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아니 자신의 의지와 뜻에 의해서 만나지 않은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요? 애초부터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예수님을 찾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왕을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위치를 잘 지키며 원래 살아오던 대로 잘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 온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너무나 싫은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흠을 잡고 트집을 잡고 결국에는 밀어내기 위해서 죽여버리는 것 아닙니까? 그런 목적을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어떻게 동방박사들이 다시 돌아와서 고스란히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알려주게 하시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베들레헴 지역에서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한명을 죽이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모든 아기들을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을 살피며 기도로 준비하여 예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주님을 만나는 것에는 상관없이 이전에 아는 성경만으로 만족하며 기도를 하지도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개인적인 유익을 얻기 만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들은 모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중에 어떠한 편에 속하는 자들입니까? 주님을 찾아나가는 자입니까,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자입니까? 주님을 찾아 나간다면 몸의 편안을 버리고 시간을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자가 되겠지만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자들은 너무 귀찮아서, 너무 아까워서 마침내는 주님도 버릴 수 있으며 주의 영광을 가리는 부끄러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방박사들처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별의 인도함을 따라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준비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헤롯왕과 대제사장, 그리고 서기관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또한 그렇게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재앙을 피하고 감정을 피하고 음욕을 피하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냥 제 자리에 있기만 해서는 도저히 그런 유혹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그러한 유혹들로 팽배해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부디 우리가 더욱 주를 따라나가서 다가오는 성탄절에 우리의 예물로 주께 경배드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