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7-11-25 주일오전 본문: 창세기 26:23-32 (구36) 요약: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서 사람과 상황의 형통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형통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와 계시고 이제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장막을 하나님의 만난 곳에서 펼칠 수 있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축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성: 1.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서 복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사람과 상황의 형통함을 얻었다. B2 2. 우리도 하나님을 만날 때에 우리 삶에서 사람과 상황의 형통함을 얻을 수 있다. A1 3. 하나님은 우리를 이전부터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다. C3 4.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장막을 칠 때에 그 축복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A3 주제: 은혜, 평안, 실천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딱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상황’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결코 어려움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도 상황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다면 결코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한 상황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은 잠시 접어두고서 생각할 때에 다른 사람의 도움과 상황의 도움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께 그 도움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난다면 사람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상황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의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는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사람’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로인해서 그는 계속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상황’을 찾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다니고 있었고 계속해서 새로운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한 우물을 파지 않았고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사람과 상황의 문제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장소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밤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하나님은 이삭에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은 왜 이삭에게 복을 주실까요?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은 이삭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도를 할 때에 꼭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주변에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누군가 믿는 사람이 있을 때 그는 결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주변에 있는 그 사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바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그는 아무개 성도의 남편입니다. 아무개 성도의 아내입니다. 아무개 성도의 아들입니다. 아무개 성도의 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삭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일단 축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좋게 보셨고 축복을 해주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이웃이, 옆집 사람이, 지나가던 사람이 여러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초청에 응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인도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결국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만나면 복을 받을까요? 하나님의 복은 정말 효력이 있는 것일까요? 말로만 하는 축복은 아닐까요? 이삭의 경우는 어땠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는 정말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상황의 문제가 해결되는 유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아비멜렉이 아훗삿과 비골과 더불어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삭을 이 땅에서 떠나가라라고 하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그들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별 볼일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이삭을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여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와서 알아서 처신했습니다. 이삭과 적이 되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서 이삭은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상황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우물을 파왔습니다. 하지만 그 우물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투기 싫어서 그냥 줘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경쟁을 싫어하는 성격이 쟁투를 피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다른 분야를 개척하게는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해서 노력한 우물에서 아직 물은 나오고 있지 않았습니다. 애는 쓰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때에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절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마침내 기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종들이 나아와서 물을 얻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또한 이일은 바로 사람의 문제가 해결된 바로 그날에 함께 일어났습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에게 있었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다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십시오.” 록펠러는 통곡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황금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였습니다. 자살 직전의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해결될 수도 있고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반드시 해결됩니다. 또한 더 크게 해결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삭에게 밤에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만나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서 듣게 될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이미 우리가 이 말씀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정말 문제는 이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참으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미셨고 우리가 그 손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삭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냥 지나쳤었지만 이삭이 이 말씀을 들은 다음에 무엇을 했는지 다시 한번 주의깊게 살펴봅시다.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그곳에 단을 쌓고 장막을 친 것이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눌러앉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곳에 그는 오랜 유랑의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것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경험이 주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경험은 사실 늘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내가 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남이며 그것이 동행입니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무슨 만남입니까? 진정한 만남이란 그 다음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잠깐 구경하러 왔을 지라도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아예 눌러 앉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장막은 이곳에 쳐져 있습니까? 우리는 이곳에 장막을 쳤습니까? 정말 이곳이 주님을 만나고 단을 쌓으며 장막을 치고 다시 우물을 팔 수 있는 곳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까? 주님을 정말로 만난다면 어디에서든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시간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여러분의 유랑생활, 방랑생활이 끝이 나고 사람과 상황의 문제가 해결받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곳을 이삭을 가리켜 ‘브엘세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언약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언약을 지키고 그로 인해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을 만나고 소유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