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영광과 기쁨의 날입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일로 너무 바빠서 주님의 부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부활의 날은 언제나 이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과 하늘의 영들과 권세들의 영광돌림과 찬양이 울려퍼지는 날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왔다간 성인들의 죽은 날을 기념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다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죽는 것보다는 살아나는 것이 훨씬 더 기쁜 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축복과 영광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활이 일어난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맨 처음 부활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부활 자체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즐겁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두려웠습니다. 더 괴로웠고 더 힘들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죽으신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더 큰 비난과 멸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파숫군을 두어서 무덤에 일반인의 접근을 막게 하였고 유대인들은 제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절에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점차 더욱 폐쇄적이 되었고 자기들끼리만의 은밀한 모임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행동 이면에는 그들의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안심하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한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따르던 예수님은 죽으셨고 세상 사람들은 다 자신들을 손가락질을 하는데 어떻게 그들의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분명 문들을 다 닫아두었는데 예수님이 아무런 어려움없이 그곳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들어오게 막아 놓았는데 예수님은 그 안으로 전혀 제지받지 않고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이 들어오신 곳은 단지 그들이 있던 다락방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안으로도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제자들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왜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처음 만난 제자들에게 이말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만물이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부활을 맞이한 영광스러운 아침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좀 불편합니다. 물론 부활은 기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빚은 점차 싸이고 있고 자녀들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하고 있는 일은 예상처럼 그리 잘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에서나 어딜 가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들 뿐입니다. 해야할 일은 너무 많고 가지고 있는 능력은 너무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미는 손가락 같아서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다보면 자연히 소극적이 되고 수동적이 되며 점차 구석으로 점차 어두운 곳으로 점차 은밀한 일들로 숨어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실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과 같은 ‘평강’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전에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낙원에 있게 되기를 기원해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약속이자 능력이었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인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평강을 실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된 이해가 가져오는 안도감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런 안도는 별로 평안을 가져다 주지도 못합니다. 부활했다고 해서 대제사장들과의 관계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전혀 다릅니다. 평강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가 평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평강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의 필요가 바로 이 ‘평강’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제자들에게처럼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제 그것을 아멘하고 믿으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옵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그 상처난 곳을 보면서 제자들은 기뻤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맞다는 사실과 바로 그 분이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인해 놀라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분이 그 자리에 서 계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나시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또 한번 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찌어다’ 진정한 평강이 그들 가운데 충만해졌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것은 그들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습니다.처음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에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서 문을 다 닫고 꼭꼭 숨어 있던 그들에게 주님이 충분하게 내려주신 것은 마음의 평강이었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고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것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목표를 이제 우리들이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더 확실하게 잠겨질 수 있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절대 얼씬도 하지 못할 격리된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더욱 숨어들어가고 피해도망가며 물러나버릴 수 있는 어떤 은신처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은신처에서 마음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야 했던 것은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다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계십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내심을 받아 그들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함께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 목적을 가지고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더 담대하고 더 강건하며 더 굳센 모습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십니다.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이제 해야 할 것은 저들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해왔던 모든 상황에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피해왔던 바로 그 일들로 힘차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필요를 주님이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강. 바로 그것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그것을 얻기 위해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평강을 얻으려 함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섬겨야 할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는 것, 해야 할 일들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평강을 얻으려 함이 아니고 오직 사명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 보내심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상황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특별히 주님은 저희들에게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며 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그 함께 하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한다면 잘하게 되거나 혹은 못하게 될 뿐이지만 성령과 함께 한다면 이건 얘기가 다릅니다. 우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지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될 것입니다. 죄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더 궁극적인 문제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단지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쁨에만 머무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신 주님의 목표를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겠습니다. 그 거대하신 주님의 목표, 평강이 넘치는 그 능력의 목표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평강을 힘입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자신의 힘으로 하지 말고 성령을 힘입어 나아갑시다. 나의 예측과 계획과 판단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갑시다. 아버지께 맡기고 움직입시다. 그래서 더이상 숨어있고 피해다니며 뒤로 물러서는 자가 되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과 함께 더욱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