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서점에 나가서 요즘 인기있는 책이 무엇인가 살펴보니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역시 이러한 경우는 예외가 아니라서 방법만 달랐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누릴 수 있을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책을 고르면서 고객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주된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유익을 누리고 살아가는가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책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욱 더 잘되는 사람이 되어가며 더욱 더 범사에 형통한 사람이 되어가는지를 다양한 경험과 화술 속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굳이 어느 몇 권의 책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목과 저자와 출판사만 달라졌지 여전히 많은 책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만큼 독자들은 그러한 책들을 더 원하고 더 찾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경향은 결코 출판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마음을 읽고 출판사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바로 그런 소원과 관심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성공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날마다 더 잘되며 범사에 형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노력과 태도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매사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쓴다 하더라도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변화된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는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별탈 없이 잘 되다가 한 순간에 쓰러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더 깊이 빠지게 되는 절망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과연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인생 속에서 생겨나는 이런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힘이 없을 때 아니 해결할 의지조차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성경 말씀 속에서 나사로는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상태가 아니었고 위독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사지내졌습니다. 그의 시체는 굴에 집어넣어졌고 입구는 큰 돌로 봉해졌습니다. 누이동생이었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울기만 했습니다.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서야 도착한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쉬움과 슬픔 속에서 마리아는 오열합니다. 그녀의 터지는 울음으로 인해 함께 온 다른 유대인들도 울었습니다. 그 슬픔을 능히 아는 터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사에 대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낙방과 실패, 손해와 빚더미 속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병과 가난과 기근과 사고 속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보면서 다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 아픔이 이해가 될 때 그것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게 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이건 혹은 다른 사람의 문제이건 문제 속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바다 속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발에 엎드려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쉬움과 한탄이 흘러나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 이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나사로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을까요? 너무 늦게 도착한 예수님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적어도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너무 늦으셨어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면 우리의 삶이 달라졌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너무 늦게 오신 것 같습니다. 이미 문제는 터져버렸고 일은 일어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도우셨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예수님은 오셔도 너무 늦게 오셨고 그 일은 분명히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고통과 괴로움은 너무나 타이밍도 절묘합니다. 일이 안될려니 어떻게 그렇게 안될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어리석음과 실수는 환경의 악함과 잔인함 속에서 절묘한 타이밍을 이루며 현실속의 고통이 됩니다.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수십번 되뇌여 보지만 역시 다시 그상황이 된다 하더라도 똑같이 행할 것이며 문제는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혹 그렇게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풍파많은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더욱 매정하고 잔인한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괴로움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다니!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장에 반박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기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무시하고 외면해야 할 뿐 굳이 상대해야 할 필요가 없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이 말은 메아리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은 살릴 수 없었는가!’ 하나님의 매정함과 잔인함이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일부러 만드신 일은 아닌가라는 의심도 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까지 이른다면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시 원래대로의 생각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떠나느냐. 그 때에는 이것이 중요한 갈등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고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전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오신 것은 아닐까요? 좀 더 일찍 이 세상에 오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 세상은 더욱 화목하고 화평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나의 삶에 너무 늦게 오신 것이 아닐까요? 좀 더 일찍 주님을 만났다면 지금 경험하는 문제는 좀더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록 너무나 늦게 오신 예수님이 야속할 뿐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의심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복을 주시면서 왜 나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일부러 만드신 고통이고 어려움이 아닐까,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망가뜨리는 분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에 시달리다 보면 아무리 한계에 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리 매력적인 분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주님은 떠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나에게 슬픔을 주시는 주님을 알려주는 교회는 목회자는 혹은 성도는 멀리하고 싶기만 한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를 다니면서 슬픔이 있었고 그 목회자를 만나면서 문제에 빠졌으며 그 성도들과 함께 하면서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인 주님으로부터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갖게되는 최종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왜 오신 것일까요? 오시지나 말지 왜 마리아에게 와서 ‘좀더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것을’이라는 아쉬움과 미련을 갖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차라리 다 잊어버리고 그냥 쉴 수 있게 내버려두지 예수님은 왜 오셔서 슬픔과 눈물을 자극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죽어 장사한 무덤을 찾으실까요? 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말하실까요? 그곳에 왜 사람들을 데리고 가실까요? 모든 것은 다 끝나버렸는데. 이세상의 어떠한 영웅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 지나고 났을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자면,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 답입니다. 예수님은 그 답을 온몸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오셔서 주님이 하신 일은 그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순간 사람들과 함께 울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도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어쩌면 여러분은 이 말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을 지 모릅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그가 어떻게 되는가는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후예배때에 다시 보겠습니다. 지금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는 것, 그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사로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필수조건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에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순간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지 않아서 좋게 보여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좋게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예수님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기중심성은 무슨 짓을 해도 만족되지 않습니다. 그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주님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주님이 일찍 오셨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보십시오. 주님이 일찍 오셨든 늦게 오셨든 그 시간은 내가 생각하는 시간일 뿐이지 가장 좋은 하나님의 시간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장 알맞게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 그것이 목표였습니다. 슬퍼하는 그녀에게 오셔서 주님은 그 눈물을 받아주십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냐하면 그 눈물 속에 그분이 얼마나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 무덤을 보시며 또 우십니다. 그 눈물을 보며 그제서야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다시 살아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복을 받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잘되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형통한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슬픔 속에서만 나타납니다. 그 눈물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날을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하지만 12월 25일 성탄절이 되기 전부터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아픔을 보시고 함께 우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 잘못으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주님은 함께 울어주십니다. 그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심을 생각하고 주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십시오. 마리아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더 큰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