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7-09-23 주일오전 본문: 요한복음 13:1-3 (신170) 요약: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실 것을 아시고 최대한 끝까지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악한 생각을 넣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며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구성: 1.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다. C1 2.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한결같이 모두 다 사랑하셨다. C3 3.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신다. C2 4.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인도하신다. C3 주제: 희생, 용서
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Now before the feast of the passover, Jesus knowing that his hour was come that he should depart out of this world unto his Father, having loved his own that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1 unto the end.1) Or to the uttermost 1προ δε της εορτης του πασχα ειδως ο ιησους οτι ηλθεν αυτου η ωρα ινα μεταβη εκ του κοσμου τουτου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αγαπησας τους ιδιους τους εν τω κοσμω εις τελος ηγαπησεν αυτους
유월절이 다가올 때에 예수님은 특별히 이 유월절이 마지막 절기가 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특별한 마지막 만찬을 함께 할 수 있기 위해서 정성을 들여 장소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비된 장소를 제자들이 알게 된 뒤에 마침내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서의 분위기를 가리켜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마지막 만찬은 실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시는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참여하시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앞으로 자신이 죽을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에 대해서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아셨다는 헬라어 단어는 ‘eidon’인데 이것은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미래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지를 주님은 보고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정말 그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랑의 극한에 이르렀다는 것일까요? 영원토록 사랑해주기로 맹세하셨다는 것일까요? ‘사랑하시니라’는 부정과거로서 일회적인 행동의 완료를 의미하는데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것은 어떤 일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죽으심을 아신다고 할 때에는 그에 대한 완전한 것을 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며 어떻게 괴로움을 겪다가 숨을 거두게 될 지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자신을 파는 가룟 유다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가 어떤 일을 할 지에 대해서 다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바로 뒤이어서 설명이 나옵니다. 마귀는 그에게 예수를 팔라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여기서 ‘생각을 넣다’라는 뜻은 ‘던지다, 뿌리다, 붓다’는 의미입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악한 생각을 거부하고 그것을 저항할 마음을 갖지 않았고 마귀가 제안한 악한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생각을 넣었을 때 그것은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의 기본적인 마음의 완악함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더욱 빛이 났습니다. 식사 후 이어지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며 발을 씻어 주면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고 배반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얼마나 주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면 제자들이 모두 가룟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고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날 지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사랑을 받았던 사도 요한 자신까지도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외면하였는가를 생각하였을 때 그는 주님이 유월절 만찬에서 보여주셨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고백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정말로 주님은 모든 불신앙과 믿음없음에 가리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에 비해 어떨까요? 더 나을까요? 더 충성스러울까요? 저 자신도 늘 도망가고 싶어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명만 아니면 얼마나 자유로울까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았다면 남들처럼 직장을 가지고 살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리더쉽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삼손에 대한 해석을 보았습니다. 철저히 어리석은 리더쉽으로 일관한 삼손은 마침내 두 눈을 뽑히고 연자맷돌을 돌리다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죽을 때 거둔 승리가 살아서 거둔 승리보다 컸지만 그는 결국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리더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토록 어리석고 육체적이었던 삼손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심을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움직인 거대한 기둥은 연자맷돌을 돌리면서 조금씩 자라난 머리카락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사랑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우리의 어리석음과 헛된 삶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것도 아니고 언약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하기로 굳게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의지와 열정을 어떤 것도 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를 위해 또 죽으시고 계속되는 고난을 겪으시며 또 살아나십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그 사랑앞에서 우리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보답을 하려고는 하겠지만 여의치는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보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고백할 수는 있습니다. ‘날 사랑하신 하나님, 날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늘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늘 고백하며 삽시다. 오늘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새롭게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