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께 성탄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휴일일 뿐이지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기념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불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여 석탄일이라는 날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 모든 불교인들이 모여서 석가모니의 생일을 기념하며 축하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불교는 이세상에서 죽은 석가모니를 믿습니다. 석가모니의 입적일, 혹은 열반일은 2월 15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어날 날은 음력 4월 8일이지만 사망한 날은 분명히 음력 2월 15일로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서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사망하여 죽은 석가모니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게 생일을 축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며, 저들은 죽어서 열반에 들어간 석가모니의 과거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우리의 예수님께 대한 생일은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생일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우리들을 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2. 목자들은 베들레헴에서 자신들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아기에 대한 천사의 말을 듣고 그 말을 확인했습니다.
그러한 의미는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천사의 나타남과 그 선포와 찬양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들을 위해서 구주가 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 구주는 구세주, 구원자, 그리스도라고도 하는데 오래전 부터 예언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성경에 오래전부터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구세주,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바로 목동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알려준 것입니다. “눅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기쁘고 감사하며 놀라운 소식이었을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가 온 것입니다! 그 메시야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만 위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온백성에게 미치는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주가 나셨던 것입니다. 천사는 그 증거로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가면 그곳에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구세주, 메시야, 그리스도가 나신 증거라고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목동들이 들은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들은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정말로 그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표적을 경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가 구유에 뉘여 있는 집이 어딘가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정말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천사의 말이 맞았습니다. 베들레헴에 신기하게도 구유에 누인 아기가 있었고 그 아기가 바로 우리가 아는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설명을 듣고 믿고 예수님께 나아온 우리를 동일하게 바라보십니다.
만약 목자들이 천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베들레헴에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가서 만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사들의 말을 믿었고 그 안내대로 따라가서 자신들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구유에 아기가 누워있다는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이자 메시야이신 구주가 나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전 부터 그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마침내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날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있었고 존재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어떻게 아들이 있느냐는 것과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이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입고 친히 세상에 올 수 있느냐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더이상 다른 종들을 보내시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을 친히 내려보내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들의 존재는 무척이나 낯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아들인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과정이 조금 다릅니다. 아들을 믿고서 나중에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아들을 먼저 알고 그 이후에 아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믿음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 뵈었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이해해 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단지 과거의 예수님의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고 감사하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우리들을 바라보십니다.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와서 보았습니다. 구유에 누인 그 아기는 자기를 찾아온 목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찾아왔는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 볼 때 주님도 우리를 주목해서 보신다는 이 개념은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주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주님은 오래전 부터 나다나엘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나아올 때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주셨습니다. 그에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주님께로 나아오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온다면 그는 마음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4.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주님을 잊지 말고 늘 그분을 찾아서 만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무생물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에게만 보인다는 옷으로 임금님을 벌거벗게 하는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동심과 환상을 자극시키는 산타놀이를 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고 그분의 나심을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존재하시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에 관한 모든 성경의 말씀이 그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사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막연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예수님은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만이 그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세상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심판과 천국에 대해서 말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도덕과 바람직한 인생살이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인한 심판과 그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탄절에 한 아기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한 분의 생일을 축하하려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이 성탄절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오래 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심을 감사하고 축하하며 찬양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과 동행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의 생일에 초대되었고 이 생일의 시간을 통해서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놓지말고 잊지 말고 더욱 붙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분이 인생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과 천국에서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하면서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능력이나 혹은 도움에 비교될 수 없는 가장 놀라운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오늘 성탄절에 더욱 만나시고 찾으시며 따라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