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은 도피성에서 의도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고 회개하는 자들이 도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민수기 35장에는 매우 특이한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도피성 규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지역을 분배하고 성읍을 나누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전체 이스라엘 지파들이 거하게 되는 지역에서 48개의 성읍을 구별해서 레위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여섯 개의 성읍은 도피성이 되게 하셔서 부지중에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피하여 살 수 있는 곳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섯 개의 도피성은 지역별로 분포되었습니다. 요단 이편에 세 성읍과 가나안 땅에 세 성읍이었습니다. 이 성에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지중에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피성으로 도망가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도망가지 않는다면 살인당한 자의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서 도피성에 거한다면 그곳에서는 누구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부지중에 알지 못하고 죄를 저지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냥 그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울 것입니다. 정말 의도하고 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죄를 지은 다음에 죄책감도 없고 후회도 있고 계속 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지은 다음에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습니다. 또한 자신의 죄의 결과를 잘 알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흉악범들과 함께 분류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흉악범들이 자신의 지은 죄로 죽는 것처럼 단순 죄인들이 같이 죄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을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이킬 수 있도록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도피성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피의 보수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부지중 살인한 자들이 도피성에 머물러 있게 하셨습니다.
2. 그들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러면서 도피성에서 레위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번 도피성에 죄인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이것이 도피성에서의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에 피해 들어온 사람들은 다시 돌아갈 날을 꿈꾸면서 대제사장이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대제사장이 죽게되면 그 때 비로소 자유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기다릴 것입니다. 두고 온 자신의 직업과 삶이 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그때를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대제사장이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도망자들은 레위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레위인들은 원래 도피성에 거하는 사람들인데 새로운 도망자를 맞이하여 그들과 함께 일을 하며 생활을 하며 교제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제사장이 죽을 때 비로소 그들을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내줍니다.
여기에는 아마 두 가지 도망자의 유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유형은 끝끝내 무리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 떠나기만을 기다리다가 결국 때가 되어 아무런 미련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유형은 그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다가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에 아쉬움을 안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속의 진정한 목표를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동일하게 부지중에 죄를 지었지만 정말 그 속에 악한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 선한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살인에 관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세미하고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도피성에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의 진정한 내면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살인을 하고 죄인이 되어 도피성에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 속에는 진정한 의로움과 선함이 있는지를 도피성에서 살아가는 레위인들과 함께 사는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범죄한 그들이 레위인들틈에서 자신들의 죄를 위해 대제사장이 죽는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셨고 진정한 회개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도피성으로 부지중 살인한 사람들을 보내어 피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단지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교화하고 회복하고 변화시켜 다시 세상에 나아가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지중에 죄를 지은 것은 결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정말 그가 깨끗하게 살았다면 그런 살인의 경험은 그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받아야 합니다. 또한 그가 그렇게 의로운 삶이 아니었다면 그의 마음은 온전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사는 도피성으로 그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 도피성에 있는 동안 그는 진정한 치료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셔 섬기는 레위인들을 통해, 일생동안 경건하게 살아가는 날때부터 구별된 레위인들을 통해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의 핵심인 대제사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모셔 서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그 성읍의 어른입니다. 대제사장보다도 더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고하고 그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의 도망자들은 바로 그 대제사장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상한 마음이 치료되고 악한 마음이 변화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사함을 위해 빌어주는 대제사장을 통해 자신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있게 하는 그 은혜를 깨달으면서 사람을 죽였다는 충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이 더 감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이전에 악하게 살면서 온전치 못한 삶을 살았지만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사는 삶을 보고 배우니 이전의 악한 모습이 깨우쳐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마침내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에 그는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나를 위해 대제사장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하고 고맙게 느껴져서 슬플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자유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서 그는 진정으로 회복되며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기쁨은 잠깐있다가 사라지지만 슬픔은 오랜 기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진정한 회개입니다. 순간의 체면치레가 아니라 잠깐의 굴복과 비굴한 고백이 아니라 진정한 선한 삶에 대한 목표와 결심, 그것이 바로 참된 회개요 주님이 바라셨던 삶이요 부지중에 죄를 저질렀던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4. 그들이 있던 그곳은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아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깨닫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 우리는 도피성이 아닌 교회라는 곳으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악을 깨닫고 그 악으로 인한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해주시는 대제사장에 대해서 듣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삶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를 위해 지금도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는 예수님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며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시는 그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교회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게 합니다. 한번도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한번도 누군가에게서 생명은 커녕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중 일부도 받아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생명을 보여주시고 전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관계를 맺게 하고 세상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사람들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놀라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은 반란세력에게 잡혀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반란세력들은 기독교인들을 반동이라고 몰아붙였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손목사님의 두 아들을 총살한 것입니다. 이후 진압작전을 통해 이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이 붙잡혔는데 그는 안재선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고 실제로 사형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그를 구해내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죽으면 지옥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손인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항상 자기와 함께 다니게 했답니다. 이 양자는 정말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에 감복해서 참 아들이 되었고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손양원목사님을 총살하였고 그 때 손목사님의 장례식을 치룰 때 상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복하였고 예수님의 사람들의 사랑에 감복하여서 마침내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손목사님의 사랑에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딸 손동희 권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딸은 두 오빠가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심한 공황상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또한 두 오빠를 죽인 범인이 잡혔을 때 그가 죽기를 간절히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으로 범인을 양자로 맞이하고 그것을 딸에게 인내와 끈기로 설득시켰을 때 마침내 그 자신도 그를 오빠로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손동희 권사님은 진정한 용서를 하게 되었고 분노와 미움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신 손양원 목사님의 놀라운 사랑이 모두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도피성에 있습니다. 이 도피성에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깨닫고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와 변화를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제사장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길을 떠나버리는 그러한 도망자가 되지 말고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대제사장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부지중에 악을 행치 않는 온전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도망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비로소 도피성을 마련하시고 그곳에 레위인을 두시고 대제사장을 죽으심으로써 변화를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교역자를 보내어 주시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삶속에서 믿게 하셔서 변화를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변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