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행]9: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행]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2011.10.2. 주, 주일오전예배, [51계획]
*개요 {6서신서} [3감정]-[6실천]
최근 여러분들은 뉴스나 방송매체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사람이 어떤 새로운 지위에 뽑혔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대법원장에 뽑히고 새로운 사람이 장관에 뽑힙니다. 새로운 사람이 시장에 뽑힐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후보에 오른 사람을 청문회를 통해 검증하기도 하고 후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투표를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항상 적용되는 사람을 세우는 기준은 그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과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입니다. 이것은 비단 정치권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누군가를 뽑아야 할 때 누군가를 세워야 할 때 그가 지금까지 무엇을 해오고 있는가를 주목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것과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새로운 지위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를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억지로 세운다 하더라도 그 지위에서 해야 할 일을 잘 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지금 해왔던 일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맡기시는 일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세우십니다.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리고 그분의 사람을 세우심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우상 만드는 자의 아들인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노예로 애굽사회에 들어온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레위사람도 아닌 에브라임 사람인 사무엘이 위대한 제사장이 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가장 어리고 양만 치던 다윗이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중에서 가장 말이 안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여기서는 사울의 경우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가 교회를 전파하고 증거하는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나니아는 그런 자는 사도는 둘째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기도를 받는 것 조차도 가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눈이 멀은 것은 잘된 일이라고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울에게 가서 안수해주라고 했을 때 거부하였습니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이런 일이 단지 아나니아의 경우만 해당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에 대해서, 우리 부모에 대해서, 우리 형제나 자매에 대해서 가장 비관적인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우리 학교에 대해서, 우리 직장에 대해서, 우리 나라 사람에 대해서 가장 부정적인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장 절망적인 사람은 누굴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근거는 충분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해온 삶과 지금도 하고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안 되는 것이 당연하고 되서는 안 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과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판단을 뛰어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우리가 다 안 된다고 할 때 주님은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 불가능하다고 할 때 주님은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일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대한 주님만의 방법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미래의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과거는 과거일뿐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미래란 항상 새로운 주님의 역사하시는 시간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의해 지배되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권능으로 자신의 계획을 선포하십니다. 그 계획에 따라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우십니다. 이 일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이러한 놀라운 수준차이를 저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수준 차이 속에서 깨닫습니다. 예전에 저는 당구를 잘 치는 사람과 함께 당구를 친 적이 있습니다. 전혀 맞추지 못할 것 같은 각도 속에서 실력자는 그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 방식으로 칩니다. 그리고 그것이 놀랍게 맞아들어갑니다. 당구 뿐만이 아닙니다.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칩니다. 타이거 우즈가 골프공을 가지고 묘기를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기에 가깝습니다. 축구는 어떻습니까? 유명한 축구선수가 골대를 맞추면서 연습을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도저히 일반인은 따라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합니다.
그렇습니다. 전문가는 다릅니다. 실력자는 다릅니다. 그에게는 그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서 안 된다,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불러서 그가 안수를 받고 다시 보고 주님의 이름을 세상에 전하게 하신다는 것일까요?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은 친히 사울에게 나타내 보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그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지를 보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가 해를 얼마나 입혔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해를 받아야 할지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다른 제자들도 해를 받고 수난을 겪었던 것임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보복차원에서 사울에게 해를 입히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크고 아름다우신 계획으로 사울을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갔다는 자신의 신앙고백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만약 그가 죄값을 치르는 것만 생각했더라면 결코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고생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푯대를 바라보고 모든 고생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았기에 비로소 더욱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특별한 방법이 바로 여기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도 그 핍박한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사역한 것이 아니라 부름의 상을 보여 주시고 그것을 위해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미래가 바뀌어집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 큰 것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지선씨는 교통사고로 인한 화재를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겪고 예배에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가 보스턴 재활상담대학원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을 때 그녀는 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도저히 불가능하리라는 세상의 절망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소망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주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새로운 기준을 바라보며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를 불가능하고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보여주심에 따라서 더 큰 것을 바라보며 변화되게 되어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 사람에 대한 절망과 한숨, 그리고 자포자기로 일관하지 말고 하나님의 소망과 확신과 약속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상을 위해서 고생을 감수할 수 있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에는 다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역을 통해 유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이 10월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생각하면서 더욱 주님의 기준과 방법에 맞추어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그 부르심대로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