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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충만] 45행19; 1-7 요한의 세례에서 예수님의 세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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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행19; 1-7 요한의 세례에서 예수님의 세례로_1

 

 2013.5.5.주. 주일오전.  주제설교-충만

 

*개요   {4복음서신서} [2유형]-[5은혜]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5월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5월의 첫번째 주일입니다. 그런데 또한 5월 5일 어린이날이기도 합니다. 즐거운 어린이날이 주일과 겹치면서 별로 즐겁지 않은 어린이날이 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 입장에서는 특히 기독교인 가정의 어린이들에게는 큰 손해가 났습니다. 이날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니까요. 어른들도 손해입니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요. 앞으로는 대체휴일제도를 만들어서 이러한 손해를 막아보려고 한다고 하지만 법안확정까지는 갈길이 멀어 보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러저러한 5월의 첫 번째 주일이자 어린이날을 오늘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부터 어린이의 호칭을 떼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기억을 못한다면 우리들의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부터 어린이날에 특별한 것을 해주지 않아도 될까요? 저희는 큰딸은 어린이날과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어린이날에 선물을 해주지 않고 특별히 어디엔가를 가지도 않습니다. 큰애는 지금 중학교 2학년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교복을 입고 좀 어른스러워지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둘째는 아직 5살이라서 완전히 어린이입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난 애기가 아냐, 난 언니야’라는 자아정체성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부모로서는 그러한 정체성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둘째가 더이상 어리광을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충 중학교 선에서 혹은 더 엄격한 부모님은 초등학교4,5,6학년 까지 해서 어린이의 꼬리표는 떨어진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의 발달이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속도는 앞으로도 더욱 빨라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활속의 성장과 발전은 빨리 진행되는데 신앙에서의 성장과 발전은 어떤가요? 신앙속에서 우리들은 언제쯤이면 ‘어린이’의 꼬리표를 뗄 수 있을까요? 또한 어떻게 해야 ‘어린이’가 아닌 ‘어른’스러운 신앙인의 모습을 갖게 될까요? 그것은 어린이처럼 생활하지 않고 어른처럼 생활하는 것인가요?

 

저의 둘째 딸이 올해 어린이 집에서 유치원으로 옮겼습니다. 어린이집에서는 더이상 다닐 수가 없어서 시설과 과정이 준비된 유치원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친구와 헤어지게 되는 것을 싫어했고 새로운 환경에 가는 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된  다음에 저희 부모는 자주 물어봤습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비교해 보니 어떠냐’고 말입니다. 딸아이는 초기에는 어린이집이 더 좋아라고 말해서 마음을 안쓰럽게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유치원이 더 좋다고 말하더군요. 왜냐하면 이곳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고 더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더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를 한군데 꾸준히 다니기는 하지만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기관에는 분명히 이름이 있고 과정이 있어서 이러한 전학인지 진학인지가 분명하지만, 신앙생활에는 그런 이름이나 과정이 없어서 발전하는 것인지 유지하는 것인지 퇴보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볼 때 발전과 퇴보에는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신앙생활이 교육기관처럼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더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뿐이지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원한다면 때로는 정 반대로도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더 적은 활동과,  더 적은 친구와, 더 적은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을 원하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부 단순히 기호와 성향의 변화일 뿐이지 신앙의 성장과 발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생활의 발전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성도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일출의 태양을 본 적이 있는데 그 태양은 엄청 커보이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일출의 태양은 보통 생활에서 보는 태양보다 더 커보일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분이 의견을 냈습니다. 일출의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동해안으로 간 것이니까, 이곳 서울에서보다 더 태양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태양이 커보이는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의미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다른 의문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보는 태양은 한국에서 보는 태양보다 더 클까요? 더 나아가서 미국에서 보는 태양은 한국에서 보는 태양보다 더 클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애물이 없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장애물이 없다면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위치에서나 태양은 크게 보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보다는 동해안이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그 관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그 사이에 장애물이 생기면 생길 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것은 결국 신앙생활의 퇴보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장애물이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은 점차 크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신앙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런데 그들은 신앙수준이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별로 관계가 깊지 않았습니다.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그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다만 성령을 받지 않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아볼로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볼로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예수님을 믿고 성경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세례는 알지 못했습니다.

“행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하고 다만 요한의 세례만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이방에 살고 있어서 유대에서의 진행된 일들을 다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그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자세히 하나님의 도를 풀어 일러 주었지만 에베소에 있던 아볼로와 같은 자들은 아직 아무에게서도 그런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알고 성령의 세례는 모르는 이러한 상태가 바로 신앙적으로 ‘어린이’에 해당됩니다. 어리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배워나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도 주셨고 성령의 세례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승천하면 성령이 오실 것이니 그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 모든 사역을 하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세례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은혜가 우리가운데 온전히 부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앙의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바로 에베소에서 만난 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의 가르침 속에서 그들은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발전되는 모습을 보십시오.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다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들이 모르는 부분을 깨달았습니다. 요한의 세례 이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그것에 순종했습니다. 그일을 통해서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바로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것이 성령의 세례의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열 두 사람만 해당했으니까 열 두 사람이라는 숫자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임함을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그들 자신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그들에게서 작은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그들과 함께 하시는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해와는 달리 단순히 방언과 예언에 집착한다고 해보십시오. 또는 이전에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다가 이제서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은 누구를 의식하는 것이겠습니까? 자신은 남들보다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남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다시 남들보다 더 우월하게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 동화책 중에 앤서니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쓴 동화책이 있습니다. 종종 둘째 딸이 읽는 것이 재미있어서 저도 같이 보기도 하는데, 그 내용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너도 갖고 싶니?’라는 제목입니다. 두 친구가 나오는데 한 친구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친구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도 갖고 싶니?, 너도 갖고 싶니? 너도 갖고 싶니?’  그런데 다른 친구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갖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만 친구관계를 그런 물건, 치장, 장신구 등으로 국한시켜 버리는 그 어리석은 친구를 불쌍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집요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환경, 상황, 소유물, 수준’ 등으로 국한시켜 버릴까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 그분 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생각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갖는 허영심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단지 성령의 세례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영혼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계가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어린이였고 이제 주님 앞에서 어른이 되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바로 이때에 에베소에서 만난 그 열두명의 제자가 기반이 되어서 생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4)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받았던 영적체험은 그 어떤 것이라도 결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는 일회성이 있습니다. 과거의 그러한 영적체험은 그때로 끝나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다시 재현되지 않습니다. 또한 재현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영적체험으로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났던 그 하나님이 정말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그분은 더 놀라우신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전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전무후무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관계의 경험을 재현하려고 하지 말고 발전시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그 분을 아는 것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던 어떤 사람들의 경험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 그 한분으로만 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속에서 ‘그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과 ‘그 능력의 크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방언이나 예언이나 은사나 체험 보다도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너도 갖고 싶니? 너도 갖고 싶니?’라고 외치는 그런 ‘어린이’가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더 깊게 알고 있는 책임있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족에게, 교회에, 이웃에게, 사회에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요한의 세례에서 예수님의 세례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이 ‘소유’에서 ‘관계’로 나아가시는 삶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은 진정한 신앙의 성숙과 새롭게 알게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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