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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44행3; 14-21 주앞에서 유쾌하게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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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행3; 14-21 주앞에서 유쾌하게 되는 날_1

 

 2013.4.21.주.주일오전, 주제설교-용서

 

*개요   {4복음서신서}  <1적용> [3감정]->[5은혜]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2)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구한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늘 부담스러운 의미를 갖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분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기억나게 만듭니다. 점차 의인이 되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본성에 또다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닌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자존심은 어린아이에게서도 발견합니다. 저희 딸은 뭔가 자신이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하면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버팁니다. 그러다가 계속 추궁하면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뭔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왜 잘못인지 납득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말로는 잘못했다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 이런 본성이 있습니다. 저부터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계속 보고 있는 엘리야, 엘리사, 사환의 이야기도 역시 그런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깨달음 정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을 용서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논리적인 비약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혹은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저항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약이든 저항이든 이제 우리가 보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구약에서부터 시작해서 멀리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를 베드로의 설교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1.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오늘 말씀 속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 속에서 회개하라는 외침보다 사실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용서받으라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담대히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회개하라는 말이 어쩌면 거슬릴찌 몰라도 좀더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은 너희가 용서받으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회개하라는 인간의 실천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회개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용서받아야 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14,15절입니다.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에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잡히시고 빌라도의 재판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수 한명을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바라바라 하는 죄인을 원했습니다. 의로웠던 예수님은 죽이고 진짜 악인이었던 바라바는 놓아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생명의 주이시자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죄였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죄였다면, 이방인들의 죄는 창조자 하나님을 거부했던 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자일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죄이고 우리는 이 죄를 용서받을 때에만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다른 어느 누군가가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죄 가운데에서 주님앞에서 용서받는 자일 때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용서를 받으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이미 용서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 용서를 회개함을 통해 받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회개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한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만 하면 이미 이루어진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용서를 통해서 유쾌하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이미 용서를 해 놓으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극악한 죄를 저질렀으나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이 저들의 죄로 인해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서 대신 해받으시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대신 사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를 죽였는데,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셨던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용서하심을 받아들이고 회개를 하기만 하면 약속대로 그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래 전 예언되었던 구원의 계획을 주목해 보십시오.

“사53: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원래 의인이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짓고 그 죄만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래 죄인이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짓고 그로 인해 모든 죄를 사함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 의해서 죽으신 그리스도께 우리가 용서함을 받을 때 우리는 구원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용서하심이 예비되어 있으니 회개를 통해 그 용서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방법만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찰인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내고 잠적해 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들은 자신이 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은 기적적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범죄한 아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자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값을 치르고 용서를 구할 때에 아들은 비로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자유로움과 그 떳떳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하나님은 바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유쾌하게 되는 날을 바로 우리가 얻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그런 날이 이른다는 것은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숨어서 어둠속에서 주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3.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자들이 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회개를 하기만 하면 죄 없이 함을 받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로 인해서 유쾌하게 되는 날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유쾌하게 되는 날은 날마다 도망다녔던 그 슬펐던 날들, 그 전혀 유쾌하지 않았던 날들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생각만해도 기대가 되고 설렙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하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주를 죽이게 된 이유는 살인한 사람을 놓아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살인한 사람을 놓아달라고 했는가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애초에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악한 행동과 모든 악한 의도와 모든 마음의 추한 욕구를 다 고백하고 시인할 때에 비로소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 진정한 회개가 하나님앞에서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에게 죄사함이 일어납니다. 그 괴로움은 너무나 컸지만 그러나 회개로 인해서 얻게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유쾌한 날들입니다. 그 유쾌한 날들은 단지 마음의 홀가분함과 감정의 고조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회개로 인해서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받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주님 있는 곳에 나아갈 수 있는 것, 주님의 임재앞에 거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함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만이 그 분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전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죽였던, 우리때문에 죽었던 바로 그분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재림하시지 않지만, 만유가 회복되었을 때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정말 우리가 재림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용서받는것이 필요합니다. 그때가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의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게 되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4.    사르밧 과부는 죄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을 만났다.

 

이러한 죄사함에 대해서 성경의 한 장면을 들려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본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당시 심각한 가뭄이 들었는데, 엘리야 선지자는 이 과부에게로 가서 그녀와 그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밀가루와 기름을 달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과부는 그것을 엘리야선지자에게 내주었고 그후로부터 신기하게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고 다시 생겨나서 세 사람이 계속해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때의 일입니다.

“왕상17: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그녀가 한 이말이 죄문제를 다루고 회개나 용서를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와닿습니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원함을 알지 못했거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했거나, 사환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했거나 어떤 경우든지, 그 모든 상황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함과 범죄함을 의식하게 합니다. 또한 용서해준다, 회개하라는 말도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거나 혹은 괴롭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아들의 죽음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고, 그것때문에 나쁜 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으로 인해 죄가 생각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를 얻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는 것이지 죄를 생각만 나게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여인의 고통의 말을 들으면서 엘리야 선지자는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 어미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결국 주님은 엘리야가 그 아들을 살리게 하시기 위해서 그 과부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또한 그 여인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결코 그 여인을 괴롭히려고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서 이 여인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그 용서로 나아갑시다. 그 은혜를 의심하지 말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용서를 누립시다. 주님의 우리의 친구이시지만 친구로 생각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생이시지만 선생으로 생각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구주이실 때에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임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죽은 자가 살아나고 우리의 죽은 모습이 살아나고 우리의 죽은 영혼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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