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복음으로 부르신 것이며 더 나아가 구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생으로의 부르심이며 괴로움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동일한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은 기쁨과 감사의 부르심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슬픔과 괴로움의 부르심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 편하게 예배에만 나올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그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고생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유있고 편안하게 주일을 지키지만 다른 사람은 바쁘고 분주한 중에 그리고 피곤하고 힘든 상태에서
주일을 지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나누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힘겨운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다른 사람은 교회에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으로 이익과
유익을 누리지만 다른 사람은 신앙이 있다는 것만으로 불이익과 편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모든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아가지만, 다른 사람은 마음 졸이고 마음 아프고 늘 다른 사람들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차이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이후에
우리 삶속에 있는 일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좋을 수가 있고 나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에 대한 설명을 성경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차이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차이로 인해서 결국 무엇이 나타나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차이를 네 가지의 대비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첫
번째 대비는 대제사장과 백성에 대한 대비입니다.
1.
대제사장 vs. 백성 : 취함을 받은 자와 예물을 드리는 자의
차이
본문에서 대제사장과 백성에 대한 부르심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이라는 위치와 ‘백성’이라는 위치가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그들의 현격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은 하나님께로부터 취함을 받은 자이고 백성은 예물을 드리러 나아오는 자입니다. 이 두 가지 차이가 그들의 삶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모든 백성들의 죄의 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제물을
가지고 나아와야 했고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해 대제사장이 대표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존귀하고 더 거룩했으며 또한 누구보다도 더 힘들고 더 괴로웠습니다. 그가 모든 백성들을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죄악이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속죄제사를 드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백성들을 위한 제사에 더하여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위한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가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대제사장이 되었을까요? 1절을 다시 보십시오.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바로 이일을 위해서 주님이 특별히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그 부르심으로 인해서 대제사장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힘든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부르심 때문에 괴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받는 자들은 다 그런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2.
아론 vs. 미혹한 자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와 스스로
취한 자의 차이
두 번째 대비는 아론과 미혹한 자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아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였다는 것이고 미혹한 자는 스스로 취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론이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미혹한 자, 또한 무식한 자라는 표현은 여기에 대한 배경이 되는 사건을 알지 못하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아론이라는 이름의 등장과 미혹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2절부터 4절에서 보게 됩니다.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여기에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한다(deal)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미혹한 자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아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스스로 부른 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론이 정말 하나님의
대제사장인지를 의심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항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민수기 16장1절입니다.
“민16: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이러한 항명으로 인해 고라와 그의 가족 및 그와 함께 한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지만
여전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각 지파의 족장들의 지팡이와 아론의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여호와의 장막 안에 두었다가 그 이튿날 보았습니다. 그러자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습니다.
“민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이것이 바로 아론과 다른 족장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와 스스로 취한 자의 차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아론의 지팡이에만 살구열매가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통해서 축복하시고 아론을 통해서 죄사하시고
아론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은 부르심을 받은 아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더 우월했고 그러한 자가 스스로 부른 자들을 용납해야 했습니다. 그들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다루었던 것입니다. 왜 때로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감당해야만 합니까? 그가 부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vs. 멜기세덱 :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과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의 차이
이제 세 번째의 대비는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입니다.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대비에서 우리는 이 두 존재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분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정해진 규칙대로 ‘반차(순서)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함으로 순종하고 복종하신 분이셨고, 멜기세덱은 충성함으로 자신의
맡은 직무를 다하였던 하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부르심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5절입니다.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의로 모든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부르심으로 이세상에 오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멜기세덱의 뒤를 잇는 대제사장이 되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자신의 위치와 임무 가운데에서 대제사장의 충성됨을 보였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자기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려 온 인간을 위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고통스럽고 괴로웠으며 통곡하였고 눈물을 흘렸던 까닭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대속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고난의 잔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 잔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의 아들이었고 그분의 대제사장이 되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로의 부르심은 괴로웠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대속의 대제사장이 되는 부르심이었고 예수님은 그 괴로움을 통해서 진정한 대속사역을 이루셨던 것입 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보다 더 괴로울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괴로움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마치 예수님의 괴로움처럼 괴롭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집의 책임맡은 일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대해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에 대해서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관계자가 아니라 당사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은 사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가를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의 가족들만이 누리는 고통인 것입니다.
4.
대속주 vs. 창조주 : 통곡과 눈물로 경외하심과 간구와 소원에 대해서 들으심의 차이
이제 마지막 네 번째 대비는 대속주와 창조주의 대비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주로서 통곡과 눈물로 경외하심을 나타내었을 때에 그 경외하심을 받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간구와 소원을 들으신 것에서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시고 그분을 경외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나 그 경외하심을 받으시고 예수님의 간구를 온전히 들어주신
하나님의 들으심의 가치는 동일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부르심이 온전히 이루어지는가를 발견해 보십시오.
7절입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이미 부르심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만으로 들으심을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부르심에 대해서 온전히 경외하시고 순종하셨기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그 경외하심의 근본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예수님은 자신을 살려달라고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한 장면이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간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심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간구한 것은 아버지의 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계획,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기도에 들으심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고통도 다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온전하게 마치실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들으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니었다면 온전한 들으심은 없었을 것입니다.
부르심이 있기는 했지만 들으심이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온전한 부르심과 들으심을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부르심의 완성입니다. 그 부르심은 받았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들으심을 얻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모범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부르심을 이루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경외하심으로 인해 그 간구와 소원을 들으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들으심을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셨던 목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든 구원은 오직 그분의 간구하심으로만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 속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습니다. 어려움도 있고 감사한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르심을 받지 않는 상황과 대비해 보면 그
어떤 힘든 일도 사실 다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그 놀라운 부르심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그 부르심을 완성하십시오. 그 부르심에 들으심을 얻으십시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에 대한 부르심을 완성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더 높은 부르심을 깨달으며 당면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