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무리한 요구를 따를 수 없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
대화를 부자청년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청년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셨고,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무리한 요구는 21절의 한 부분입니다.
“21…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부자 청년의 입장에서는 이 말때문에 그 뒤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말씀해 주셨고, 또한 부자청년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21…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외에는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그를 부르셨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서 말씀하신 무리한 요구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은혜의 부르심은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애초에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가 예상했던 것은 자신이 얼마나 확실히 영생을 받게
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계명을 알았고, 그 계명을 어려서 부터 다 지키며 살아왔는데,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바랬던 것입니다. 설마 거기다 대고 가진 소유를 다 팔라고 하실 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알게 된 모든 말씀과 이전부터 지키는 모든 말씀만으로 신앙생활이 끝이 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받을 것은 오직 예수님의 칭찬과 상급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담대히 천국이 다가오기를 기도하고, 영생이 바로 자신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칭찬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전혀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부자청년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헌신을
명하실 때 성도들은 당황스러워 합니다. 별다른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어려움이 따를 때 성도들은 힘들어 합니다. 주일신앙만으로 잘 감당하고 있는데
더 많은 것을 요구받을 때 성도들은 주춤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그저 애 잘 키우고 가정 잘 돌보는 것이 전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더 큰 사명에 대해서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젓습니다. 이 모든 경우는 온실 속의 신앙에서 비로소 현실 속의 신앙으로 바뀌는 가운데 생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이런 일을 당하면서 심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2.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이제 이것이 얼마나 부자청년에게 놀라운 기회이며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단계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이 장면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하면,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주님은 그를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를 한심하게 여기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는 어려서 부터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아마 모태신앙이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를 거치면서 신앙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세대의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온
자가 아니라 어쩌면 대대로 주님을 믿어온 자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쨌던 그런 부자청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청년이면서도 부자였던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신앙의 유산이자 부모님이 받았던 신앙의 축복의 결과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은혜의 공급속에서 그는 지금까지 잘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단지 그 수준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맞는 신앙의 발전단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계명을 읽고 듣고 아는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에 얽매여서는 안되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을 부른 자를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세상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는 무엇을 먹고 삽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먹여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보화를 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는 다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앞날이 불투명
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것은 다 계획되어 있습니다. 공급하심과 채우심과 따르게 하심에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인도하십니다. 책임지시고
붙드십니다. 부자 청년은 바로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개신교회는 1883년에 황해도에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서상륜, 서상조 형제는 중국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했는데 마침 만주에 있는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황해도에서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후에 1887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와서 서울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을 때에 이 소래교회를
들렀습니다. 그리고 교회 개척의 계획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를 따라 황해도에서 서울로 옮겨서 교회 개척을 도운 사람이 10명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오래 살아왔던 황해도 땅을 떠나서 아무 생활 기반이 없는 서울로 오는 일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봇짐을 지고 서울로 와서 새롭게 세워지는 새문안교회의 개척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 교회의 일을 도우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자녀들도 선교사님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목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교육자가 되어서 훌륭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논과 밭을 버렸지만 더 좋은 지식과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버리는
자에게 오히려 더 큰 것을 얻게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영생을 얻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왜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복받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또는 신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는 한 가지 목표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애초에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주님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선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최종적인 대답은 무엇인가요?
그것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아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냥 주님을
따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대화중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 여기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선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면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한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소유를 버리면서 따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18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주님은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선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단지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었습니다. 인간을 악하게 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아들이신 그분도 역시 선하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그 다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21절을 보십시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만약 주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악한 분이라면, 그래서 내가 그분에게 철저히 속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일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단지 선생님뿐이라면 어떻게 하늘에서 주시는 보화를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참으로 선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동시에 그
선한 하나님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이일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대로 자신의 소유를 드린다는 것은 그분이 진정으로 그
이후를 책임져 주시고 붙들어 주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이후에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주님이 가시는 곳에 따라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초에 부자청년이
원했던 영생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주님이 영원토록 그 일을 하시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처럼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결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자를 죽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영생은 그래서 이루어집니다. 그냥 무슨 공식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스토리가 있고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영생할 사람이 있고 영벌에 들어갈 사람이 있습니다. 영벌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영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자신과 함께 있는 자를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 그 영생을 얻을 방법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선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이 말씀을 믿고 따랐다면 정말 원하는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그분의 것을 누리는 자들이 되자.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자를 받으셨고 그들을 위해 피흘리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계속해서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생을 얻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들을 영생으로 부르시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기쁨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행하고, 그분을 따라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뭔가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어떤 일이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이러한 기쁨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2절입니다.
“요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주님은 지금도
그 일을 이루시는 것으로 배가 고프지 않으십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면서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이러한 일들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일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소유를 다 바치는 것에 걸림이 되어서 주님을 떠났지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에 자극을 받아서 더욱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힘에 지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전 성도들이 그랬고 지금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교회는 발전하게 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시대에도 주님의 일들로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12년 전에 저희들을 부르셨고, 또 4년전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영생을 새롭게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주님의 일에 흔들림 없이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때로는 생각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이
반드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이 교회가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데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주님의 영생을
누리게 되며 주님과 함께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