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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41막9; 20-27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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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막9; 20-27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주님_1

 

 2012.9.9.주. 주일오전, 주제설교-희생

 

*개요   {5복음서} [4욕구]-[5은혜] <C분석>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고 모든 것을 참으시면서 귀신들린 아이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 함께 하시고 모든 것을 참으시면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고생하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려움 당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생과 어려움의 시작이 사실 우리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런 어려움으로 인해서 주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혹은 우리의 죄와 상관이 없다면 더더군다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는 안됩니다. 마치 포장이 안된 돌짝밭을 차를 타고 갈 때에 차가 덜컹거리고 흔들린다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안전띠를 꽉 잡아야 합니다. 더욱 자신의 몸을 차에 강하게 밀착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험한 인생길때문에 차에서 떨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1.    귀신들린 아이는 몸이 귀신과 연합되어서 절망적인 상태였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 데리고 온 아이의 모습은 가히 절망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몸과 마음이 다 귀신과 연합되어 버렸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망가지는데 마음은 아무런 저항이 없었습니다. 이미 마음도 몸도 귀신에게 붙들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모습이 20절에 나옵니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지만 아이가 예수님을 보고 반응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몸 속에 있는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아이로 하여금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 경련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속에 있는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경련으로 인해서 그 아이는 땅에 엎드러져 굴면서 입에서는 거품을 흘렸습니다. 전형적인 간질발작 증상이었습니다.

 

간질은 다른 말로 뇌경련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뇌경련이나 발작증세가 다 귀신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경련이 귀신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귀신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닐 때에는 몸의 이상증상이나 체력저하인 몸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만, 귀신 때문에 오는 것일 때에는 마음의 문제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이 자신의 의지와 감정상태가 귀신과 연합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아이의 몸 속에 들어간 귀신의 목적은 몸의 파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그렇게 저를 잡으면 거꾸러지고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점차 파리하여져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데려 왔을 때 이런 상태는 극도록 심해져서 도저히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를 보신 뒤에 그 문제에 대해서 그속에 있는 귀신에게 묻지 않으시고 그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주님이 아버지에게 물으신 것은 이미 아이의 상태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 아이의 의지를 대신해서 귀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이 아버지는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귀신의 목적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귀신은 아이의 생명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불과 물에 자주 던져서 함께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건지고 살려서 오늘까지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언젠가는 죽고 말것입니다. 아버지는 간절한 마음으로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믿음은 없었지만 이 아버지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간절함을 보셨습니다. 지금 이 아버지에게 믿음은 없지만 간절함이 있다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간절함을 원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믿음없는 자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구원하신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귀신 쫓는 기계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데리고 오는 족족 물리쳐주시는 퇴마사의 모습을 그릴 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기사 도와달라고 했을 때에 그냥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특별히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도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도우시는 이유는 ‘귀신쫒는 선지자’이어서가 아니라 귀신들린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도와주십니다. 그렇게 불쌍한 이유는 귀신들려서가 아닙니다. 귀신들려서 귀신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조정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귀신에게 이리 저리 치이고 있습니다. 마치 주인없는 어린 양처럼 늑대의 밥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참한 상태를 주님은 불쌍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편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바로 그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그 능력에 의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주인을 선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의 지배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이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서 귀신들린 아들과 아버지의 영혼에 대한 주인이 정해졌습니다. 그의 구주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아이의 영혼과 연합되어 있는 이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위치로 이 아이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아이와 아버지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의 주인은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시도이시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주님은 이일이 어떻게 될지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 앞에서 귀신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그 귀신은 벙어리와 귀머거리 귀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의 영향력 하에서는 말할 수도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물어서 아신 것이 아닙니다. 그 존재를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에게 그 은혜를 나타내셔서 그 아이에게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나가는 모든 귀신을 쫓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귀신에게서 고통받는 자들을 모두 도우신 것도 아닙니다. 귀신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들을 찾으셨고 그들을 발견하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우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3.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는 그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사실 그들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바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모든 사망과 고통과 괴로움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죄값을 갚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원래 주님의 목적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가 주님께 나아와 도움을 얻고자 했을 때 그가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을 가졌을 때에 그를 도우셨습니다. 이 모든 것에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깔려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보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그 모든 의미가 담겨져 있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주 이상한 일이 26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님이 내쫓아주셨을 때에 귀신은 정말 아이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냥 조용히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귀신은 모든 발작을 다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소리지르게 하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망가뜨린 아이는 죽은 것 같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귀신은 쉽게 나가지 않았습니다. 편안히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나가기는 했지만 상태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치료가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더 나빠졌습니다. 아예 죽은 것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동안 오래 전부터 몸과 마음속에 살고 있던 귀신이 나가버렸을 때에 그 귀신이 살고 있던 사람은 마치 공기 빠진 풍선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만큼 귀신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함께 하심은 귀신을 쫓아내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 눈부시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죽은 것처럼 누워있던 그 아이에게 주님은 다가가십니다. 오랫동안 귀신으로 인해 고통받다가 그 귀신의 마지막 발악으로 인해 거의 죽어버린 그 아이에게 주님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아가십니다.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혹은 불편해 하거나 혹은 이상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아이에게 주님은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애초에 주님은 바로 그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두려워했지만 주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남들은 싫어했지만 주님은 싫어하지 않으셨으며 남들은 포기했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바로 이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죽었던 자를, 혹은 완전히 죽었던 자를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주님을 믿는 자로서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4.    주님은 지금도 모든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일으켜 주신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함께 하심은 때로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분이 설마 나의 이런 저런 고통을 알고 계실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실 우리 옆에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문제를 주님께 내어놓기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문제를 내어놓고 도우심을 받고자 할 때 주님은 아무 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고민 많고 어려움 많은 이 세상에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느냐구요?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왜 문제를 통해서만 주님께 나아가게 될까요? 평안이나 축복으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미 근본적으로 죄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 죄로 인해서 반드시 사망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이 찾아오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죄 가운데서, 혹은 죄로 인한 문제 가운데서 주님을 찾고 찾아서 그분을 만나면 그때는 변합니다. 주님은 모든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일으키시사 의를 위해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평안과 감사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가운데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럴 때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이든지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주시는 이 놀라운 희생을 생각하면서 가장 괴로울 때에 주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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