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속자(324)
  • 새글
  • 출석
  • |
  • 로그인
  • 회원가입
  • 검색

[55동행] 42눅24; 44-53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심

Loading the player...



42눅24; 44-53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심_1



2012.6.17.주. 주일오전. 주제설교-동행

*개요 [56동행] {5서신서} [5은혜]-[6결심]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자를 만나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불신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전도를 나가보면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만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만나는 신자로부부터 우리는 불신자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전도를 할 때 불신자에게서 더 많은 안타까움과 불쌍함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신자에게서도 적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안타까움과 불쌍함을 느끼게 됩니다.

불신자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저 사람이 저러다가 지옥에 갈텐데’라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하며 성령님을 외면하다가는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텐데라는 걱정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거부하더라도 어쩌면 언젠가는 나중에 구원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믿지 않는 그 거부함에 마음이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에게서 느끼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저 사람이 저러다가 천국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텐데라는 안타까움입니다. 주님을 믿고 천국에는 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갈 수 있게 된 천국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관심이 없고 오직 지금 당장 누릴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만 빠져있으면 나중에는 틀림없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를 보면서도 그 연약한 신앙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다.

우리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주님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의 미적지근한 신앙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서 잘하고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칭찬해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신앙에 부족한 자들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더 가르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전까지 주님은 계속 그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연약한 상태 그대로 있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44-45절에 나타나있습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어쩌면 더 치열하고 더 열정적인 성경공부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이전에 말씀하시고 그것을 해석해 주시던 것보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주님은 더 의미있게 성경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 구원을 이루어놓으셨고 대속의 사역도 끝내셨지만 그러나 주님은 결코 편안하게 쉬시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부활이후에 승천의 시간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제자들과 남은 시간을 즐겨도 좋았을 텐데 그러시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한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2천년전의 과거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수련회나 부흥회나 성경공부나 기타 다른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에는 많은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과거에 해당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현재적인 사역에도 역시 관심을 갖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하셔서도 도우시고 이끄시며 역사하시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게 도와주시며 우리가 자녀문제로 괴로워할 때에도 귀신을 쫓아주신다거나 혹은 병을 고쳐주신다든지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미래에 대해서는 더이상 따라나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시는데 사람들은 현재에만 머무르려고 합니다. 또는 과거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 이제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자’라고 하실 때 사람들은 손만 흔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이말이 무슨 뜻인지 46절부터 48절까지 읽어봅시다.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주님은 이제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이미 고난을 받았고 또한 삼일만에 살아났고 이제 내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도 누리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게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절래 절래 고개를 젓는 것입니다. ‘저는 못하겠는데요.’ ‘저는 증인아닌데요’ ‘저는 바쁜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이상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를 알았지만 주님의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장과 발전은 거기까지입니다. 주님의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는 미래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 사는 사람입니다. 혹은 현재에만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이 멈춰버린 것입니다. 혹은 퇴보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장과 발전이 따라옵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이 있을 때에 자라나고 강해집니다. 그렇지 않고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 그는 과거나 현재에만 매여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복음의 전파라는 미래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니다. 단지 과거와 현재만이 중요했다면 주님은 따로 성령님을 보내어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주님의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습니다. 아예 옆에서 지켜서서 가르쳐주셔야 했습니다. 또한 능력으로 채워주셔야 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은 결코 우연히 된 일이 아닙니다. 전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을 보십시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은 주님의 뜻을 지켜 행하기 위함입니다. 그 뜻은 바로 복음의 전파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바로 그 뜻을 의미합니다.


3. 예수님은 성도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으로 이끄신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으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히브리어로 ‘무화과의 집(bet anya)’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또한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살던 마을이며, 나사로를 살리셨던 곳이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에 묵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 앞까지 제자들을 이끌어 가시고 그곳에서 승천하셨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 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

그 축복해주심은 마치 모든 것이 마치는 듯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끝까지 따라온 제자들을 최종적으로 붙들어주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 일을 이루신 곳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 이름으로 나오는데 베다니는 이 감람원(올리브의 산)이라는 산 남측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일까요? 축복을 받았고 예수님은 사라지셨으니 이제 각자 자신의 길로 떠날 차례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다음 장소로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전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주님과의 동행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에 스스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이 늘 성전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시간에 보이는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들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이끄시는 것일까요? 좀더 정확한 설명은 그 예수님을 심정적으로 온전히 따르는 제자들을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게 하십니다. 결국 주님을 따르는 일이란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나오는 일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이렇게 주님을 따라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4. 우리는 주님께 끝까지 붙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어서 한 학기에 한번씩 외부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학교에 가지 않고 가야 하는 교회에 찾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출석체크를 하였고 출석을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따랐습니다. 문제는 그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멀리 버스를 타고 가야 했고 때로는 걸어서 한참 들어가야 하기도 했습니다. 늘 익숙하게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반드시 어떻게 해서든지 그곳에 도착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학교의 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생으로서 불이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어느 순간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됩니다. 매우 특별하고 생소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서 갈 것인가, 아니면 멈춰설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따라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저앉아서 주님께 손을 흔드시겠습니까?

해마다 혹은 5년마다 혹은 10년마다 주님은 그 성도들을 필요에 따라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속에 우리에 대한 주님의 미래적인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소망할 때 우리는 지금도 다시 일어서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새로운 일은 결코 무섭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만이 걱정될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주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따라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축복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서지 마십시오. 내가 용무가 끝났다고 볼일이 다됐다고 그냥 작별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축복을 받고 난 그때부터가 시작입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큰 기쁨가운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하시며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성전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원교회 유튜브 설교채널
소원교회 네이버 블로그
소원교회 네이버 전도답변
소원교회 주일오전 예배실황

주일 성경공부 교재
제자 성경공부 교재
평일성경공부 교재1
온라인 상담전도

1.신앙구조
2.성경적용
3.마음변화
4.변화방법
5.신앙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