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 이 사회에는 예수님의 희생을 그 삶속에서 나타내며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3월 1일 삼일절이 있었습니다. 다들 공휴일로서 그날을 잘 쉬면서 보내었겠지만 사실 그 날이 의미하는 바는 중요했습니다. 삼일절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제강점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해방을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조용히 그 시기를 보내었다면 우리는 결코 해방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압제에 순종하며 죽어 지냈다면 우리는 결코 오늘날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3.1절이라는 기념일도 공휴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에 희생했던, 아니 그 시기에 희생했던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의 번영과 축복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 이렇게 희생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의 존재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다시한번 그분의 희생과 고통을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애국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거꾸로 우리가 먼저 알았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의 모습으로 투영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한번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방하고 모욕하며 죽이는 자들에 대해서 저항하며 반격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취하는 그들에게 그분은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 당시에 자신을 죽이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과거에 주님이 오심을 믿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과, 후대에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2012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주님은 바로 내 죄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잠잠히 죄악의 희생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고통받았던 자들은 그 시대에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주어지는 강압에 순순히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회유나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더욱 탄압받았고 고통받았으며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살아나려고 발버둥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한순간이라도 더 살기를 바랬다면 애초에 저항하지도 않고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일제의 강압과 강점에 괴로워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그렇게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 이름도 빛도 없이 죽어간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은 우리 가까이에서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2. 교회에도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닮고 본받기 때문입니다.
더 가까이에 예수님의 희생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있는 교회에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따라서 그 모습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편안히 안정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남전도회 청소가 있었습니다. 청년부도 함께 해서 교회를 청소했습니다. 그들의 시간과 노력과 정성으로 교회가 깨끗해졌습니다. 한달에 한번 그렇게 청소를 하고, 또한 그와 같이 매주 교회를 청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 우리는 예배를 깨끗한 곳에서 드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주 식사준비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해서 말없이 그주에 모든 성도들을 먹입니다. 또한 그렇게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정성스럽게 음식을 해서 성도들을 먹였던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교사로 간사로 리더로 순장으로 학생들과 청년들과 장년들을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고 쉬지 못하고 밤을 지새워가며 말씀준비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줍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조금도 쉬지않고 여러분을 먹이고 말씀으로 가르쳤던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곁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길로 은혜의 그 길로 나가도록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건 그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어떻게 순전히 우리들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냐고 말합니다. 또한 해도 그것밖에 못하냐고 합니다. 왜 더 잘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혹평과 무시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꾸준히 끈질기게 그 일을 할 때 그 이유는 오직 그와 같은 입장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세대는 생각하기를 그가 곤욕받는 것은 그가 심문받는 것은 그리고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는 것은 자기 허물 때문이지 자신들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 죄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혀를 찬 것입니다. ‘그러게 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느냐?’ 그것이 오직 그 세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교사’나 ‘간사’나 ‘리더’나 ‘순장’이 아니고,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사모’가 아니고 ‘목사’가 아니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람들을 위한 집사였고 권사였으며 장로였고 사모이자 목사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 죄를 대신 감당하도록 그래서 곤욕과 심문과 고통 당하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직분자들이 이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가까이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희생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에서 희생하는 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3. 가정에서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길을 따라가고자 할 때 그로 인해 유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습은 여러분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찾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서 가장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제일 고통받으며 인내하며 슬픔을 당하지만 가장 인정받지 못하고 가장 무시당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장 잘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그 희생은 단지 고생하고 힘들고 괴로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희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토록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항상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보다 왜 세상의 영광이 세상의 유혹이 더 우리에게 중요하게 보여지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시지만 그분을 살아계시는 분으로 보지 않고 죽으신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그분은 강포를 행지 않으셨고 궤사도 없으셨지만 우리는 그분을 묻어버렸습니다. 그 무덤을 악인과 함께 두던 부자와 함께 두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묻어버렸는데! 주님은 살아계시지만 우리에게 주님은 죽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주고 계시지만 우리는 단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 내세우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에게 불편함과 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신다면 유익을 주시고 편안을 주시고 쾌락을 주셔야 하는데 그런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묻어버리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그렇게 희생을 가정내에서 온전히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도덕한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예수님의 희생으로 견디어 내는 아내와 남편이 있습니다. 불성실한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 더 할 나위없는 사랑으로 충성하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예수님을 생각하며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이겨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흔들리지 않으며 중심을 잡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그들을 붙들어 주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배은망덕한 자녀들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과 인내로 견디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 부모들은 언제가 되어야 비로소 자녀들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그들을 용납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를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그들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또한 매정하며 불경건한 부모들에 대해서 소망과 절제로 견디어 내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모님을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비록 그런 모습을 더 박해하며 구박한다 하더라도 그 사랑과 열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은 괴롭고 슬플찌라도 언젠가는 그 남편이, 그 아내가, 그 자녀가, 그 부모가 언젠가는 기쁨으로 주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희생했던 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모든 희생하는 자들을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희생하심으로 당대에 이루셨던 일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4. 바로 내가 그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됩시다.
그토록 곤욕과 심문과 모욕과 저주를 받으셨던 예수님이, 그토록 버림과 멸시와 무시를 당하셨던 예수님이 결국에 이루신 일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희생하셨던 예수님이 그 희생을 통해 마침내 이루셨던 일은 무엇인가요?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예수님이 상함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 죄를 감당해야 했기에 누군가는 그 악함을 품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더 아프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씨를 보게 됩니다. 자신처럼 그렇게 희생하는 예수님의 사람들을 보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날은 길 것입니다. 그 날은 영원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또한 애초에 하려고 하시는 구원이라는 놀라운 하나님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헛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그 희생에 함께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사회에서, 이 교회에서,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은 희생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는 목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순장이나, 간사나, 교사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명칭이나 직책이나 위치를 가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있는 곳에서 ‘희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모습을 함께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처럼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혹시 손해가 나지 않을까요? 무의미한 삶을 살지 않을까요? 무시와 멸시를 받게 되어서 기분이 나쁘게 되진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희생을 나타낸다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하나님은 이것을 예수님께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약속해주십니다. 그 희생이라는 고통은 ‘영혼의 수고’입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 죄악을 씻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모의 고통을 통해서 아기가 나오는 것처럼,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은 희생을 감수할 때에 그로 인해 놀라운 의로움이 놀라운 죄사함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에 굴하지 않으시던 ‘주기철’목사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자식을 죽인 범인을 오히려 더 큰 사랑으로 받아주시던 ‘손양원’목사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고, 각 교회에서 희생하는 자들이 그 교회를 의롭게 하는 것처럼, 각 가정에서 더 많이 희생하는 자들이 그 가족들을 의롭게 하는 것처럼, 그 모든 희생은 의로움이 무엇이며 죄사함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보여 주며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번 한달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심’을 기억하며 그 희생을 온전히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의로움과 놀라운 죄사함과 그로 인해 놀라운 기쁨이 넘쳐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