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여러분은 삶속에서 얼마나 희락을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삶속에서
희락을 누리는 시간을 생 각해보면 희락을 누리는 때보다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즐거워하는 때는 잠시 뿐이고 즐거워하지 못하는 때가 더 오랜 시간 걸립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물론
계시겠지만 체감적으로 우리가 희락을 느끼는 시간은 마치 밥먹는 시간과 같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이 밥을 먹지 않는 시간보다 더 적은 것처럼 희락을 누리는 시간은 희락을 누리지 않는 시간보다
더 적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희락을 누려서 희락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희락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그 희락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당장 기뻐서 기쁜 사람보다 기쁨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뻐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뻐할 일이 없지만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신기할 정도로 기뻐하는 삶을 살았던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상황은 기뻐할 일이 없고 기뻐할 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17절입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의 고백은 놀라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화과나무가 무성해야,
포도나무에 열매가 있어야, 감람나무에 소출이 있어야, 밭에 식물이 있어야, 우리에 양이 있어야, 외양간에 소가 있어야 마음이 기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배가 부르고 몸이 편하며 따뜻한 곳에 누워있을 수 있어야 기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부족하고 결핍되며 모자르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괴로움과 슬픔이 있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러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원래
성격이 좋고 별다른 걱정을 안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괴로움과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그가 들었던 것은 악한 무리가 치러 올라온다는 날에 대해서 들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뼈는 썩었으며 그의 몸은 처소에서 떨었습니다. 악이 다가온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힘든 일입니까? 앞으로
무섭고 걱정스러운 일이 닥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두려운 일입니까? 분명 그로 인해서 우리도 뼈가 썩고 몸이 떨리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 대장내시경을 했습니다. 예전보다는 많이 간소화되었다는
모든 준비과정을 거치고 비수면 내시경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참을만 해서 이제 곧 끝나겠지 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수근거리기도 하고 몇명의 의사선생님들이 모여드는 것도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아파서 애써 참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끝은 났는데 팔에다가
뭔가를 채워주면서 다른 특진 선생님을 만나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대장에 용종이 발견되었는데 내시경과정에서는 용종을 떼어낼수가 없었고 다른
전문장비로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가능한 전문장비(ESD)로 떼어내보기는 하겠지만, 저의 경우가 어쩌면
전문장비로도 떼어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그 부위만 잘라내고 대장을 연결시키는 복강경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점차 커졌습니다. 단순 내시경 검사에서 복강경 수술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즉시
입원을 하고 CT를 찍었습니다. 대기를 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제발 이번에 그 용종이라는 것을 떼어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마음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왔습니다. 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어찌 되든 하나님께 맡기자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입원한
지 4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준비가 되어 다시 전문장비를 통한 내시경 시술을 받았습니다. 이번엔 수면으로 해서 모든 과정을 거쳤는데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고 깨어나보니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이 그 용종을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조직검사용 샘플을 떼어냈으니 한
주 있다가 그 검사결과를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퇴원은 했지만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왜 모든 일은 점차 꼬여만 가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다시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 제가 경험했던 이러한 예기치 않은 일들은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로 인해서 우리는 얼마나 뼈가 썩고 몸이 떨립니까? 기대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바랬던 상황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들이 우리 삶속에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로 우리는 희락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희락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또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희락을 얻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는 희락입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희락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상황과 형편이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에 그 세상밖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희락할 수 있게 하는 희락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만 그 희락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이
없을 때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희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다른 어떤 것들보다 먼저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주 발렌타인 데이가 되어 저는 초콜릿을 두 통 받았습니다.
하나는 사모에게서, 하나는 큰딸 예인이에게서입니다. 나중에는 둘째 딸 지인이도 줄 테니 세 통을 받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주지는 않고
같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아빠가 받은 초콜릿을 맛있게 같이 먹고 나서 어느 정도 지나서 저녁 밥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밥먹기 전이었는데도
지인이는 저에게 초콜릿을 먹으면 안되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말해주니까 저녁 먹기 전에 초콜릿을 또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초콜릿을 먼저 먹으면 저녁밥을 못먹으니까 저녁밥을 먼저 먹고 초콜릿을 먹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두개를 다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인이가 이해를 하고 초콜릿을 먹고 싶은 마음을 잘 참았습니다. 그리고 저녁밥을 잘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희락에 대해서 지금 당장 초콜릿을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우리 입에 초콜릿을 물려주시면 얼마나 행복할 까 하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희락이 현재의 감정에 기초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경험해보고 희락하게 되는 것을 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모든 희락의 전부는 아닙니다.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이라는 그의 책에서 참된 신앙의 표지는 믿음에 기반한 거룩한 감정에 기초한다고 말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희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에 기초하는 것보다 감정에 기초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희락은
더 나아가 의지에 기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있는 이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희락은 바로 의지에 기초하는 희락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지, 정, 의 가운데 의지에 기초하는 희락은 가장 온전하고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락입니다. 우리는 그 의지적인 희락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너무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그러나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희락을 누리며 견디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박국에서 누가복음으로 넘어갑니다. 누가복음 23장입니다.
“눅23: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된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였지만 그러나 그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하던 죄인보다 그 죄인에게 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춰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바라보시던 곳이 어딘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은 낙원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낙원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달려계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죄를 지고 죽어가고 계셨지만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지만
주님은 그 모든 과정이 끝날 때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견뎌내신 것입니다. 앞에 있는 희락을 바라보기 때문에 지금 고통스러워만 하지
않고 그 희락 속에서 구원받기에 합당한 또 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희락이었습니다. 진정한
희락의 모습이 하박국 3장에서 누가복음 23장으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희락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제가 내시경을 할 때, 원래 용종을 떼어내면 2박 3일동안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용종을 떼어내지 못하고 그냥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원을 하는 것은 좋았지만 용종을 떼내지 못한 것은 걱정스러웠습니다.
또한 더 큰 것이 오지 않을까 근심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퇴원을 하고 나니 그런 걱정을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없이 또 한 주간 교회일과
상담으로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어떻게 해서 주일까지 지나니까 다시 근심이 찾아왔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기도를 했는데
당연히 집에 와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해주십시오.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그랬을 때에 정말 주님께 다 맡기는 마음과 그로 인한 평안함을 다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결코 기뻐서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려고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기뻐서 기뻐하는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일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주님의 기쁨을 바라보며 기뻐하고자 할 때에 정상적인 사람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이었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희락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 희락에 대해서
히브리서 12장이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하박국 3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희락이 누가복음 23장에서 구체화 되었고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에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현재의 즐거움을 누리신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조차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마침내 모든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정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희락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달려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보는 희락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박국 3장과 누가복음
23장,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희락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기쁨입니다. 성경을 관통하면서 존재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기쁨으로 인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모든 부족과 결핍과 연약함과 상함으로 인해 날마다 슬픔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사탄이
좋아할 만한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세상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참된 주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먼저 그것을 누리면 세상의 기쁨은 나중에 누릴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기쁨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인 것이 되어서 그로 인해 시험에 들거나 실족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쁨을 통해
그리스도를 정말 닮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주님의 낙원에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3:19절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힘으로 삼아 주님이
인도하시는 높은 곳에 이르게 됩니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 경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직검사결과를
기다리면서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다 주님께 맡기기로 하고 알아서 하시겠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검사결과를 보는 날이 되어서 의사선생님을 만났는데
의사선생님은 이것이 ‘호산구에 의한 염증성 혹’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혈구의 구성요소인 호산구라는 것이 몸속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를 둘러싸는데
그렇게 둘러싼 다음에 섬유화되어서 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고,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걱정한 내용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만 없으면 아무 용종도 없는 깨끗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잘 끝나게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진정한 희락을 앞으로도 사모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희락을 누리며 살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희락을 사모하면서 희락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누리는 희락을 이제 시작해 보십시오.
그것은 지금은 의지적인 희락이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될 때 그것은 진정한 희락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희락이 정말 중요하고
가치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희락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희락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진정한
희락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