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15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채움과 충만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채워짐을 느끼는 것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채움으로 끝내지 말고 충만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채움에서 만났던 하나님 보다 더 큰 하나님을
만납니다. 채움 정도로 끝나지 않고 충만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충만을 경험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나아만장군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문둥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의 이야기가 충만으로
나음을 입은 예가 되는 이유는 그가 병이 낫기 위해서 물속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물을 그속에 채운 것이 아니라 그가 물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한 충만을 통해 그는 놀라운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아만장군이 어떻게 이러한 충만을 경험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봅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왕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아람은 늘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던 주변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왕때부터 아람과는 계속적인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열왕기상22장에서는 이스라엘 왕이 아람과 싸우다가 전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이스라엘로 왔습니다. 그에게는 문둥병이 있었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람의 군대장관이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이스라엘에 오게 된 이유가 열왕기하5장 2,3절에 있습니다.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스라엘에서 한 여자아이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 아이가 나아만 아내를 수종들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전쟁중 잡은 포로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듣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아람왕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왕에게
찾아가서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말하였지만 나중에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오게 하였습니다. 사실 여종이 말했던 선지자는
바로 엘리사 선지자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처음부터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왕에게 가서 병을 고쳐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소망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길을 꾸준히 올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마련하신 충만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물론 잘못 갈 수도 있습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충만을 얻고자 노력하다 보면 결국은 그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잃을 때쯤해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끝까지 가는가입니다. 그 길의 초반부에서 그만두면 그 길의
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사라집니다. 동네 약수터나 산 정상이나 매 한길이기 때문에 누가 얼마나 오래 가는가가 중요하지 산 정상으로 가는 특별한
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얼마전에 관악산에 등산을 하러 갔는데 낙성대 예술인마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관악산에 오르는 길이 주택 옆에 붙어 있었습니다. 설악산이나 오대산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옆에는 아이들이 등교하고 마트를 오가는 그런 거리를 지나 산으로 들어섰고 산 초입에는 어르신들을 위한 운동기구와
공원이 있었고 그런 길을 한참을 지나서 계속 올라가니까 비로소 서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전망대가 나왔습니다. 저도 더이상 가지는 않았지만
제가 갔던 길은 계속 더 가면 연주대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충만을 사모할 때 이런 저런 시행착오와 경험들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몇번 해보았다가 낙심한 뒤에 그런 낙심을 정당화한다면 하나님의 충만으로부터는 더 멀어질
것입니다. 나아만도 이스라엘왕에게 찾아갔다가 다시 선지자 엘리사에게로 방향을 바꿔갔는데, 이렇게 방향만 바꿨지 가려는 의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점차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아만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엘리사가 전해준
말때문이었습니다.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를 들으며 화를 냈습니다.
그 말은 몸을 씻기만 하면 살이 깨끗하게 되리라는 자신에게 유익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은 기분나빠 했습니다. 왜나하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자신을 존경해 줄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존경은 커녕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자신을 맞으러 나오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 해야할 일만 전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런 기대와 너무나 달랐을
때 그는 엄청나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그만두고 중단하고자 했습니다. 화가 나니까 다른 모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다름을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 충만을 우리에게 숨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은혜로 가는 것을 거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 은혜의 길은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 길을 스스로 어렵고 복잡한
길로 단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 길에서 돌아서서 떠나 버릴 때 하나님의 충만의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기도원을 간다고 해보십시오. 당장 기도원의
그 먼 거리로 인해서 불편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기도원의 특별한 분위기에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각자 자신의 기도제목에 집중해 있는
다른 성도들 때문에 신경이 거슬릴 것입니다. 기도원의 그 열악한 환경때문에 거부감이 들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왜 기도원에 왔는지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의 기회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흔들린 마음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단순히 동조하지 않고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해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진정 올바른 안내자입니다.
나아만장군에게도 그런 지혜로운 종들이 있었습니다. 고집스럽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는 나아만장군에게 여기에 온 목표를 생각해 보시라고 말하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었습니다.
“12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사람의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는 대단합니다. 그 결과보다도 그 과정에
집중할 때 어리석기가 한이없습니다. 나아만장군은 요단강보다 다메섹 강이 더 깨끗하지 않으냐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다메섹 강들에서는 백번 씻어도 깨끗하게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에서만 씻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병원을 다녀도 가까운 병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설이 깨끗한 병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료비가 싼 병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병원에서 병을 낫게 되느냐입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에 갑니다. 그곳이 멀거나 혹은 사람이 너무 많거나 혹은 비싸거나를 따지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목적은 치료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낫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변화시키시고 발전시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 어려움을
감당하고 인내하며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낫고 깨끗하게 되며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장군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시키느냐입니다. 아무리 그 뜻이 유익하고
중요해도 이해시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나아만 장군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하의 엘리사도 은사가
넘쳤던 엘리사도 떠나가는 나아만장군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그를 잡은 것은 그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들이 나아만 장군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데 이보다 더한 일이라도 하면 했지 이렇게 작은 일을 못하시겠냐고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그런 귀한 종들이 장군에게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귀한 종들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우셨습니다. 애초에 그에게 이스라엘 종의 조언을 듣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어떻게 해야 문둥병을
나을 수 있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종들을 통해 그 말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고 그 도우심을
받으며 나아갔습니다. 그럴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순종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15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해서 요단강에서 일곱번 몸을 씻었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을 받는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담갔습니다. 요단강물은
그를 덮었고 그는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럴 때 그의 외부가 온전히 건드려졌습니다. 그의 내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몸만 집어넣었지 마음은
집어넣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의 내부인 마음은 그의 몸이 깨끗하게 된 다음에 변화되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 와서 몸이 나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의 몸만 깨끗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은혜를 채우는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에만 은혜가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만 은혜를 채웠지 그 몸은 여전히 그 은혜를 따라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만 채우면 늘 그때뿐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충만은 달랐습니다. 충만은 그 몸을 움직여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몸과 마음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비로소 몸과 행동에서 온전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대순서로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아갔습니다. 비로소 몸을 일곱번 씻었습니다. 그것은
몸이 깨끗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몸과 마음이 깨끗해졌습니다. 무엇이 먼저이든지 간에 둘은 일치 됩니다. 마음에서 몸이든, 몸에서
마음이든 이 둘이 일치될 때 비로소 충만이 이루어졌습니다.야고보서에서는
이러한 마음과 행동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납니다. 그 한 예로 야고보사도는 귀신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귀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믿음이 있을까요? 그들도 하나님을
압니다. 우리보다도 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들으며 두려워 벌벌 떱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귀신들입니다. 사탄보다 우리가 더
나은 자들임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떠했다 하더라도 비로소 몸이 움직일
때에 그 마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그 자체 만으로는 무의미하지만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실천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요단강에 나아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을 때 역사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아올 때에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 행동과 믿음의 변화과정 중에서 가능한 우리에게
편한대로 해석하기를 원합니다. 몸만 있으면 안됩니까? 마음만 있으면 안됩니까? 계속 묻습니다. 몸과 마음, 행동과 믿음의 일치를 듣고 보면서도
하나만 하면 안되냐고 또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원하시는 것은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은 드릴 수 있지만 몸은 드릴 수 없다, 혹은 몸은 드릴 수 있지만 마음은 드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완전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낫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그럴 때 그의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문둥병만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도 나았습니다. 그의 반응을 보십시오.
“15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그는 더이상 예전의 거만하고 존경받기를 좋아했던 군대장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자기 나라에 돌아가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충만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몸은 드리지만 마음은 드리지
않고, 마음은 드리지만 몸은 드리지 않는 항상 뭔가 부족한 그런 상태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따라가기는 하지만 바짝 따라붙기는 싫고, 함께 하기는
하지만 앞장서기는 싫어하는, 그렇게 늘 충만에서부터 약간 떨어진 상태로 온전히 그 은혜에 몸을 잠그기는 싫어하는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치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온전한 치료는 바로 하나님 안에 푹 잠길 때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물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살은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순수하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속에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과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마음과 삶이 있을 때 하나님 은혜에
온전히 나아가기를 결심해보십시오. 점차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진정한 기쁨과 감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을 바라보면서 지난 한해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의
강물에 일곱번 몸을 잠그고 새살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